[평전] '삐삐 보급' 일등공신…'박소평'으로 불린 박성득 전 차관 작성일 06-25 35 목록 <div id="layerTranslateNotice" style="display:none;"></div> <strong class="summary_view" data-translation="true">1938년 11월16일∼2025년 6월24일</strong> <div class="article_view" data-translation-body="true" data-tiara-layer="article_body" data-tiara-action-name="본문이미지확대_클릭"> <section dmcf-sid="6t20Owxp7n">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contents-hash="80c77bc8172eaa4274b2a3691e3f9b52c208fa2917b706904c640e6851776658" dmcf-pid="PFVpIrMU0i" dmcf-ptype="figure"> <p class="link_figure"><img alt="[고인 페이스북 캡처]"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06/25/yonhap/20250625112939005tyup.jpg" data-org-width="932" dmcf-mid="89FTgiqyFL"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6/25/yonhap/20250625112939005tyup.jpg" width="658"></p> <figcaption class="txt_caption default_figure"> [고인 페이스북 캡처] </figcaption> </figure> <p contents-hash="969d4f6efbb983ed799ac8e7667037c0403430c06454f64c20de782b3a3362bc" dmcf-pid="Q3fUCmRuzJ" dmcf-ptype="general">(서울=연합뉴스) 이충원 기자 = 휴대전화가 나오기 전인 1980∼1990년대에는 '삐삐'(무선호출기)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삐삐 보급의 일등공신인 박성득(朴成得) 전 정보통신부 차관이 지난 24일 오후 1시43분께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세. </p> <p contents-hash="0ee5a2610c51a8de44ce107a6034ed19c9722816e7f6ed7a978fa2c34957c373" dmcf-pid="x04uhse7Fd" dmcf-ptype="general">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8년 국립체신고(3기)를 졸업한 뒤 서울 동대문전화국에 말단 공무원으로 들어갔다. 1997년 한국경제신문 인터뷰에서 "처음 중앙전화국에 파견돼 교환기 운영을 도와주던 미 고문단실에서 근무할 당시 미국인의 월급은 한국 직원의 100배 정도인 2천 달러였다"며 "그러나 이들이 기술을 전수해 주지 않아 몰래 교환기 설명서를 일일이 손으로 베끼는 등 눈물겨운 일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p> <p contents-hash="05d51faafccd51cfd8e99a10dddbce3e4d64f33ab132e84e28563319c8b59c2d" dmcf-pid="yNhc49GkUe" dmcf-ptype="general">틈틈이 공부해서 1966년 성균관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데 이어 1970년 제5회 기술고시에 합격, 공무원 생활 12년 만에 사무관이 됐다. 이때부터 영등포전화국 기술과장, 청와대 경호통신지원반 근무를 거쳐 1984년 중앙전파감시소장, 1990년 전파관리국장, 1991년 초대 통신정책실장, 1994년 기획관리실장 등 체신부와 정보통신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96∼1998년 정보통신부 차관을 지낸 뒤 한국전산원장, 한국인터넷진흥원 이사장, KT 이사회 의장, 전자신문 대표이사 사장, 한국정보문화진흥원 이사장, 한국해킹보안협회 회장·이사장으로 활약했다.</p> <p contents-hash="3dbd168d9e840e94c4b49624a1b2e3fe5e3b63cc183473ad3d935fd03a3900f5" dmcf-pid="Wjlk82HE0R" dmcf-ptype="general">고인을 오래 지켜본 서영길 전 정보통신부 우정국장에 따르면 고인의 최대 업적은 1980년대 체신부 특수통신과장 시절에 추진한 '삐삐·이동전화 보급'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화가 일부 특권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질 때였다. 국가안전기획부 등 보안 관련 기관은 "삐삐를 원격 조정해서 폭발을 일으키면 어떻게 하느냐"고 강하게 반대했다. 서 전 국장은 "당시 고인이 보안 기관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렇게 못하도록 보완 장치를 달겠다'고 설득해서 삐삐와 이동전화 보급을 끌어냈다"고 말했다. "(행정고시가 아니라) 기술고시 출신 기술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서 전 국장은 평했다.</p> <p contents-hash="d343c3056f1fe54a34ed1a4f6324536af771a0750d6c23b0aae42039fe6a269d" dmcf-pid="YASE6VXD0M" dmcf-ptype="general">국제전기통신연합(ITU) 이사국에 진출해 전전자교환기(TDX)와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장비 등을 해외에 수출할 수 있게 한 것도 고인의 업적이다. 1989년 미국이 한국을 통신 분야 우선협상대상국(PFC)으로 처음 지정한 뒤 "1990년부터 개방하라"고 압박하자 한국 측 수석대표였던 고인이 협상 결렬을 선언하고 회담장을 박차고 나온 뒤 사표를 제출한 일화는 유명하다. </p> <p contents-hash="f42b1996d64bf20517310296036f85f9aa612c2cbc94565f97bada7084ea42ac" dmcf-pid="GcvDPfZwFx" dmcf-ptype="general">그해 한국은 ITU 이사국에 진출해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을 진행했는데, 그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1989년 프랑스 니스 ITU 회의 당시 베트남 정보통신부 전화국장이던 마이 리엠 쭉(Mai Liem Truc) 전 베트남 정보통신부 장관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베트남은 다른 사회주의 사회주의 국가 대표들의 지지까지 유도해 한국의 예상 밖 이사국 진출을 거들었다. 이에 앞서 1980년 아시아 태평양 통신기구 회의에 참석했다가 한국에 잉여 통신장비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하는 마이 리엠 쭉씨와 안면을 튼 덕분이었다. 서 전 국장은 "당시 외교부는 'ITU처럼 비동맹 국가의 입김이 센 곳에서 남북 표 대결을 벌였다간 망신을 당할 수 있다'며 소극적이었다"고 했다. </p> <p contents-hash="88195e71df023b5f0f9b4d198a26f18ba3f8118a9636dc71c92ee4f5eff538d0" dmcf-pid="HmHIdx0CpQ" dmcf-ptype="general">이 밖에도 고인은 시내전화에 3분 단위 요금제를 도입하고, 전파 사용료를 걷어 한국 정보통신 발전의 밑천을 마련했고, 통신정책실장이던 1994년에는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기획단장을 맡아 세부 계획을 입안했다. </p> <p contents-hash="8b16c393c62122f2b571327aeb21505923d190aef314d33b094c3b1299c9a01f" dmcf-pid="XsXCJMphUP" dmcf-ptype="general">154㎝ 단신에 업무추진력을 갖춰 중국의 덩샤오핑(1904∼1997)을 빗댄 '박소평'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서 전 국장은 "등소평이 '부도옹'(不倒翁·오뚜기) 아니냐"며 "고인도 도무지 포기를 몰랐고, 남들이 어려워하는 일을 골라서 솔선수범했기에 '박소평'이라고들 했다. 한번 인연을 맺은 이들을 살피는 것도 남달랐다"고 그리워했다. </p> <p contents-hash="e2329e9782e39a03e8581abab80f2c6ea14f83b76469c88e2bd0b6546d376121" dmcf-pid="ZOZhiRUl06" dmcf-ptype="general">아들 박세호(전 SK텔레콤 근무)씨는 "세계 최초로 CDMA를 상용화할 때 한몫 거들었다고 자랑스러워하시곤 했다"고 말했다. </p> <p contents-hash="2d9a6977a159149bb80888364eea9f25d2e8705432df8f5a05fb0dc7a1bca37f" dmcf-pid="5I5lneuSU8" dmcf-ptype="general">chungwon@yna.co.kr</p> <p contents-hash="dd2221a4febae9bad80c1928e768ee7b3755d89bdc135bd78cffb5e3a3a0cf10" dmcf-pid="1C1SLd7v04" dmcf-ptype="general">※ 부고 게재 문의는 팩스 02-398-3111, 전화 02-398-3000, 카톡 okjebo, 이메일 jebo@yna.co.kr(확인용 유족 연락처 필수)</p> <p contents-hash="c3d353d5388a0a1898df6096a50f1409f66770022bb166f162ca19d81a783085" dmcf-pid="FlFTgiqy0V" dmcf-ptype="general">▶제보는 카톡 okjebo</p> </section> </div> <p class="" data-translation="true">Copyright © 연합뉴스. 무단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p> 관련자료 이전 BioSolution, Hainan Officials Explore China Entry Strategy 06-25 다음 '퀀텀 코리아 2025', 글로벌 양자협력 허브 도약 06-25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한 회원만 댓글 등록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