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혀 있던 노년 여성에게 날개 달아준 찬란한 '첫여름'[최영주의 영화관]

작성일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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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심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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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첫여름'(감독 허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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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첫여름' 스틸컷. 메가박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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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 영화의 러닝타임은 영화관을 나선 후에도 이어집니다. 때로 영화는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비로소 시작합니다. '영화관'은 영화 속 여러 의미와 메시지를 톺아보고, 영화관을 나선 관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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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일러 주의
 누군가의 할머니, 엄마, 아내. 개별적인 존재가 사라진 명사 속에서 자신을 지워갔던 노년 여성 영순씨의 첫여름은 찬란했다. '첫여름'은 영순이 다시 만난 첫여름을 향해 날아오르는 순간을 더듬어간 끝에 우리가 가진 틀을 깨부순다.
 영순(허진)의 오랜 춤 파트너이자 애인이었던 학수(정인기)가 갑작스레 연락이 두절된다. 그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영순에게 학수의 아들이 부고를 전한다. 영순은 다음 날 아침에 학수의 49재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러나 그날은 손녀딸 석윤의 결혼식이기도 하다. 영순은 학수의 죽음과 함께 자신의 삶을 느릿하게 더듬어보기 시작한다.
 '첫여름'(감독 허가영)은 로그라인부터 어떻게 보면 충격적이다. 손녀 결혼식 대신 남자 친구의 사십구재에 가고 싶은 할머니는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이라 부르는 시선으로 봤을 때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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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첫여름' 스틸컷. 메가박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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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 이해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는 지점들을 하나씩 따라가며 벗겨간 끝에 만나게 되는 것은 이해 가능한 영역이다. 동시에 그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건 우리가 노년 여성을 바라보는 '틀', 즉 고정관념이다.
 노년이 될수록 잃어버리는 게 있다. 바로 '이름'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름으로 불리는 대신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할머니로 불린다. 이름을 잃는다는 것은 '자기자신'을 잃어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누군가의 OO이란 지칭 속에 나의 욕망, 나의 꿈, 나의 사랑, 나의 삶 역시 희미해져 간다.
 영화 속 영순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할머니로 살아오는 동안 영순은 '영순'으로서의 모든 것을 억누르고 살아야 했다. 영순으로서의 꿈 대신 딸의 꿈을 지켜주고, 영순으로서의 삶 대신 남편과 딸을 위해 살아야 했다. 영순으로서의 새 시작 대신 손주의 새 시작을 가야 했다. 그런 영순의 삶은 가을을 지나 겨울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었다.
 영순에게 다시금 첫여름처럼 다가온 것이 학수다. 학수는 조화처럼 생명을 잃었던 영순에게 나비처럼 다가와 생명을 불어넣어 줬다. 땅에 떨어뜨린 나비 브로치를 주워 영순의 가슴에 달아준 순간, 영순의 얼굴에는 다양한 감정이 샘솟아 오른다. 그 감정은 영순을 순식간에 겨울과 봄을 지나 첫여름의 한가운데 서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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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첫여름' 스틸컷. 메가박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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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수가 영순에게 준 것은 그저 단순한 사랑이 아니다. 나란히 누워 발장난을 하던 학수는 영순에게 묻는다. '영순'은 어떤 사람이냐고 말이다. 그 물음 속에서 영순은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할머니가 아닌 오롯이 영순으로서 자리 잡게 된다.
 학수가 가져온 첫여름 같은 감정과 질문은 영순에게 "난 어떤 여자일까?"라는 물음을 던지게 만든다. 그 물음은 자기 자신조차 잊었던 스스로가 누구인지 되살리게 만들고, 다른 누군가를 위한 존재가 아닌 '영순'으로서 모든 것을 갈구하게 한다.
 이처럼 학수와 영순의 시와 같이 나부끼는 문답은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익히 알던 노년이란 존재도 사실 우리와 같이 무언가를 욕망하며 첫여름과 같은 삶을 날아오르길 염원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문답 시퀀스 전후로 영화는 누군가를 위해 살아온 영순의 현재가 어떠했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앞선 영순과 문답 이후 영순은 우리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영순의 가족들은 영순을 엄마, 아내라는 이름으로 묶어두려고 한다. 한 명의 여성이자 한 존재이자 세상에 하나뿐인 이름인 영순으로서 자신의 감각을 되찾은 주인공은 손녀의 결혼식 대신 학수의 사십구재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들 그런 영순을 이기적이라며 비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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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첫여름' 스틸컷. 메가박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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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영순은 고운 꽃이 수놓아진 한복을 입은 채 손녀의 결혼식장으로 향한다. 그런 영순의 저고리에 피어난 꽃 위에는 여전히 나비 브로치가 앉아 있다. 모두가 생명 잃은 꽃처럼 영순을 대했지만, 사실 영순은 날아오르길 원하는 나비였다. 갈림길을 앞에 둔 영순은 학수의 사십구재로 가는 길을 택한다.
 사십구재가 열리는 절에서 넋을 기리는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영순은 절 밖에서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마치 학수의 넋을 기리듯, 그와의 사랑을 추억하듯, 무엇보다 자기 자신으로서 날아오르게 된 나비가 된 것처럼 춤을 춘다. 그런 영순의 얼굴에 담긴 건 영순이 보낸 그간의 계절과 지나간 첫여름이다.
 베란다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던 영순의 모습으로 시작한 영화는 다시 베란다에서 빨래를 넌 후 담배를 피우는 영순의 뒷모습으로 마무리한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영순을 사각의 틀 안에 갇혀 있는 모습으로 많이 비췄다. 마치 늘 그의 가슴 위에 달린 나비처럼, 밖으로 나가서 춤을 출 때만 살아나는 나비처럼 카메라는 영순을 비춰왔다. 손녀딸 결혼식에 입고 갈 한복을 벗는 모습을 비출 때도, 마지막 영순의 뒷모습을 비출 때도, 어느 때에도 대부분의 영순은 늘 사각의 틀 안에 존재했다. 노년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적 틀 안에서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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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첫여름' 스틸컷. 메가박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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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여름과 같은 세상에서 날아오르길 원하며 밖만 바라보던 영순은 한 차례 날아오른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런 영순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미 사회의 틀을 벗어나게 됐다. 영순의 짧디짧은 첫여름을 마주한 우리는 결코 영순을 사각 틀 안에 다시는 가둘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오히려 그 틀 속에 갇힌 영순을 보며 갑갑함을 느끼는 것은 관객이 된다. 그리고 그 갑갑함은 갈망으로 이어진다. 영순의 뒷모습은 쓸쓸할지언정, 그가 언제고 다시 밖으로 나가 첫여름 같은 세상에서 날아오르길 진심으로 희망하게 된다.
 허가영 감독은 단편 '첫여름'을 통해 한국 최초로 제78회 칸영화제 라 시네프 부문 1등상을 받았다. '첫여름'을 통해 그동안 미디어가 외면해 오거나 혹은 틀에 가뒀던 노년 여성에게 그 이름과 존재 의미를 되찾아줬다. 허 감독이 앞으로 보여줄 시선 속에서 어떤 존재들이 다시금 자신의 존재를 되찾고 날아오를지 기대된다.
 31분 상영, 8월 6일 메가박스 단독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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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g alt="영화 '첫여름' 포스터. 메가박스 제공"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08/08/nocut/20250808050328277kvkl.jpg" data-org-width="710" dmcf-mid="UcEY5VWAwY"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8/08/nocut/20250808050328277kvkl.jpg" width="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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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첫여름' 포스터. 메가박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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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BS노컷뉴스 최영주 기자 zoo719@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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