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서지 못해도, 나는 여전히 춤추는 나” [.txt] 작성일 08-31 2 목록 <font><b>일하는 사람의 초상 l </b></font><b>휠체어댄스스포츠 선수 채수민</b><br><br> 대학에서 걸스 힙합 전공한 무용학도<br><br> 7년 전 사고로 하반신 마비 지체장애인 돼<br><br> 재활 기간을 짧게 하고 사회 복귀 서둘러<br><br> “울고 있기보다, 나아가는 쪽 선택했어요”<br><br> <span class="end_photo_org"><img src="https://imgnews.pstatic.net/image/028/2025/08/31/0002763872_001_20250831120210526.jpg" alt="" /><em class="img_desc">제41회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서 채수민씨가 ‘콤비 라틴 5종목 클래스(class) 1’에 참여해 춤을 추고 있다. 본인 제공</em></span> <div style=" position: relative; margin: 20px 0; border-radius: 15px; padding: 30px; background-color: #F8F8F8;"><div style="font-size: 18px; line-height: 2.1; word-break: keep-all; word-wrap: break-word;">우리는 일을 해서 돈을 벌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보람도 얻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일 이야기를 ‘월급사실주의’ 동인 소설가들이 만나 듣고 글로 전합니다.</div></div> 인터뷰 장소는 판교의 한 카페였다. 처음 가보는 곳이어서 충분한 시간 여유를 두고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비상 상황에 대비해 이틀 연속으로 관장을 했고, 활동지원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가며 샤워를 했으며, 잘 하지 않던 화장도 공들여서 했다. 문득, 십여년 전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오늘처럼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침대에 누운 채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버둥대며 가까스로 바지를 끌어올려 입었고, 중심을 잡지 못해 여러차례 기우뚱거리며 윗옷을 갈아입었다. 이를 악문 채 통증을 참아내고 있던 터라 온몸은 금세 땀으로 흥건해졌다. 힘없이 축 늘어진 발을 운동화에 억지로 욱여넣던 끝에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겨우 옷 입고 신발을 신는 일에 이렇게 긴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는 사실이 어이없어서였다. 어째서인지, 다시는 걸을 수 없다는 커다란 불행 앞에선 담담해하면서도 일상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작은 불편들에는 번번이 걸려 넘어지던 시기였다. 아마도 그날 처음으로 장애란 ‘시간을 잡아먹는 괴물’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이제 내게 장애는 좋아할 수는 없어도 꽤나 익숙한 친구가 되었지만, 시간을 잡아먹는 괴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여전히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데도, 샤워를 하거나 머리를 감을 때도, 하다못해 세수를 하고 옷을 입는 일상적인 일에도 장애를 얻기 전보다 몇배, 심지어 수십배의 시간을 투자해야만 한다. 그래서인지 장애는 자주 핑계가 된다. 다소 나태해져도 어쩔 수 없다는 자기변명. <br><br><span class="end_photo_org"><img src="https://imgnews.pstatic.net/image/028/2025/08/31/0002763872_002_20250831120210555.jpg" alt="" /><em class="img_desc">이동약자와 그 친구들의 막힘없는 이동을 위해 접근성 정보, 콘텐츠를 모으고 공개하는 비영리사단법인 ‘계단뿌셔클럽’ 활동을 하고 있는 채수민씨의 모습. 본인 제공</em></span> 휠체어댄스스포츠 선수인 채수민씨를 처음 본 것은 우연히 에스엔에스(SNS) 피드에 올라온 몇장의 사진 속에서였다. 하반신이 마비된 지체장애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그와는 아마도 이러저러한 관계들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휠체어와 한 몸이 되어 춤을 추는 화면 속의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모습을 계속 보고 싶어 계정을 샅샅이 훑다시피 했다. 보면 볼수록, 작은 화면 속의 그를 실제로 만나고 싶어졌다.<br><br> 그가 한 엔터테인먼트 업체에 소속된 아티스트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소속사로 연락을 취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선 소속사와의 조율이 필요했다. 생각지 못했던 과정들을 거쳐야 했지만 조금도 번거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약속 장소인 카페의 통창 너머로 드디어 그의 모습이 보였을 때, 나는 환하게 웃으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나 혼자서만 그의 모습을 지켜봐왔다는 사실을 깜빡 잊은 채,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반가움에 나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br><br> 새벽 5시, 수민씨가 침대에서 벗어나 휠체어로 옮겨 앉는다. 잠이 쉬이 떨쳐내지지 않지만 서둘러야 한다. 휠체어를 몰아 화장실로 간다. 흉추 3번과 4번을 다쳐 가슴 아래로 완전히 마비된 그에게는 다소 긴 출근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 우선 배를 마사지해서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해 장에 가득 쌓인 가스부터 인위적으로 배출해줘야 한다. 수시로 몸의 중심이 무너지기 때문에 씻고 옷을 입는 데도 꽤 긴 시간이 걸린다. 퇴근 뒤 약속이 있는 날엔 화장도 해야 한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면 6시30분. 아침밥은 언감생심, 서둘러 차에 오른다. 한시간 이상 걸리는 출근길을 생각하면 낭비할 시간이 없다.<br><br> 다행히 수민씨는 운전을 즐긴다. 사고 뒤 긴 치료와 재활을 마치고 사회에 복귀해 생활하다 보니, 이동의 문제가 가장 크게 느껴졌다. 운전면허를 딴 것은 그래서였다. 운전을 하게 되니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혼자서 갈 수 있는 곳이 늘어나자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졌던 것이다. 처음부터 핸드컨트롤러를 이용해 운전을 배웠기 때문에 손으로 하는 운전이 특별히 낯설거나 어렵지는 않았다. 이제 그는 혼자서 가지 못할 곳이 없다. 자연히 하지 못할 일도 없다고 믿게 되었다.<br><br> 수민씨는 대학에서 걸스 힙합을 전공한 무용학도였다. 온몸으로 뜨거운 에너지를 발산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표현하던 그는 7년 전 일어난 사고로 척수가 손상돼 하반신 마비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사고 당시 다발성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치료와 회복에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서의 재활 기간을 가능한 한 짧게 갖고 사회 복귀 시점을 최대한 앞당기려 애썼다. 그는 지금도 자신처럼 재활 과정을 거치고 있는 이들에게 어느 정도 훈련을 받은 뒤엔 망설이지 말고 사회에 복귀할 것을 조언하곤 한다. 재활 병원처럼 갖춰진 환경에서 훈련을 반복하는 것보다는 사회에서의 실전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많을뿐더러, 사회 복귀가 빠를수록 원직업으로의 복귀 가능성도 높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경우엔 서둘러 복귀한 사회에서 경험했던 ‘나눔 일상홈’ 프로그램을 통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br><br> 한국척수장애인협회 서울시협회에서 운영하는 ‘나눔 일상홈’은 중도 장애인의 일상 복귀를 돕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평범한 일상 공간에서 일상 복귀 코치(선배 장애인)가 신청자(후배 장애인)와 4주간(24시간) 함께 생활하며 장애 손상 범위에 따라 맞춤형 교육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기 위해 찾아간 한국장애인식개선교육센터에서 강사 자격증 취득을 위한 교육을 받던 중, 그를 눈여겨본 당시 이사장의 주선으로 찾아온 기회였다. 그는 ‘나눔 일상홈’ 프로그램을 통해 생활 전반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 선배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도 춤을 출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선배들 역시 그때 알게 되었다.<br><br> 현재 그는 장애인 고용의 의무가 있는 민간 기업에 하루 네시간씩 근무하는 장애인 사원으로 고용되어 있다. 다만, 대부분의 장애인 사원들이 재택근무를 하는 것과는 달리 매일 연습실로 출근해서 일반적인 근무 대신 훈련과 연습을 반복한다. 얼마 전부터는 경력을 인정받아 코치 역할까지 겸하게 되어서 신입 선수들의 훈련도 돕고 있다. 그는 프리랜서 선수로 생활하는 대신 회사에 고용될 수 있어 여러모로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했다. 물론, 하루 네시간 근무만으로 충분한 급여를 받을 수는 없다. 시즌이 다가오면 연습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다 파트너와의 연습 시간을 맞추기 위해 주말이나 휴일 근무가 일상적인 일이 되는데도 그렇다. 휠체어댄스스포츠의 경우 아직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선수들이 종목에 쏟아붓는 열정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금전적인 어려움은 없냐는 다소 불편한 질문에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br><br> “제 경우에는 아직 미혼이고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어요. 게다가 엔터테인먼트 회사와의 아티스트 계약을 통해 다른 여러 활동들도 겸하고 있어서 그에 따른 수입도 있거든요. 하지만 오로지 회사의 급여에만 의지해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분들의 경우엔 휠체어댄스스포츠를 떠나서 더 높은 연봉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올림픽 종목으로 옮겨 가는 일도 적지는 않아요.”<br><br><span class="end_photo_org"><img src="https://imgnews.pstatic.net/image/028/2025/08/31/0002763872_003_20250831120210581.jpg" alt="" /><em class="img_desc">경기용 휠체어.</em></span> 인터뷰 말미에 장애를 드러내는 일에 거부감이나 두려움은 없었냐고 물었다. 장애를 갖기 전과 마찬가지로 장애를 갖게 된 이후에도 자신의 몸을 대중 앞에 드러내는 일을 하는 그녀에게 가장 궁금했던 점이었다. 중도 장애인의 경우, 종종 장애를 갖게 된 자신의 몸을 받아들이기까지 큰 어려움을 겪는다. 나 역시 그랬다. 달라진 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스스로를 혐오하는 순간마저 존재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진 몸에 익숙해졌지만, 나는 여전히 문득문득 마비된 내 몸이 끔찍하고, 근육이 모두 빠져버린 두 다리와 그 다리를 대신하는 휠체어를 바라보는 낯선 시선들에 마음을 다친다.<br><br> “마비가 되어 다시는 서지도 걷지도 못하게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나였어요. 그 큰 사고를 겪으면서도 내가 사랑하던 내 모습은 손상되지 않았죠. 슬프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울고 있기보단 나아가는 쪽을 선택했어요. 나를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br><br>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는 그의 대답에 조금 슬퍼졌다. 울지 않고 나아가기 위해 이십대 초반의 젊고 여린 그가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지 말해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br><br> “장애 당사자만큼이나 보호자의 태도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장애 당사자가 새로운 시도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스스로 부딪치며 사회 속에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도록 그냥 놔둬야 하는데, 많은 경우 위험하다고 말리거나 지나치게 보호하려고만 들거든요. 그러다 보면 장애 당사자는 처음의 상황에서 한 발도 더 나아갈 수 없게 돼요.”<br><br> 그는 보호자가 장애 당사자를 도와야 한다고 말하는 대신 놔둬야 한다고 했다. 그가 어떤 조력 속에서 장애와 함께하는 삶을 받아들이며 달려왔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br><br> 하루 네시간의 근무시간을 연습과 코칭으로 빼곡하게 채운 뒤, 수민씨는 다시 운전해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휠체어댄스스포츠 선수인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은 많다. 그는 우리 사회의 장애 인식 개선이나 장애 환경 개선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언제 어느 곳에서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예술가로서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는 일 역시 게을리하지 않는데, 그 모든 일들은 사실 서로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장애인 모델로서 카메라 앞에 서고, 휠체어를 탄 배우로 뮤지컬 무대에 서는 것 역시 그런 이유에서라고. 먹고사는 일도 중요하긴 하지만, 목표와 의미에 수긍할 수 있다면 수입의 많고 적음은 아직까지 그리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처음 에스엔에스에서 보았을 때와 같은 에너지가 느껴졌다.<br><br> 인터뷰하는 내내 그는 휠체어 위에 단정하게 앉아 밝게 웃고 있었다. 나보다 손상 레벨이 높아 장애 정도도 심했고 훨씬 작고 가녀린 체구였지만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단단해 보였다. 컴퓨터 모니터 속에서 그의 모습을 처음 보는 순간, 사실 나는 그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우리의 몸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고사한 나무의 뿌리처럼 말라비틀어진 채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는 우리의 두 다리도 충분히 존재 가치가 있다는 걸, 그를 통해서 처음으로 느꼈던 것이다. 9월6일 낮 2시. 나는 그가 출연하는 뮤지컬 ‘버스, 너 뭐니?!’의 표를 예매했다. 그를 향한 나의 팬심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 같다.<br><br> 황시운 작가 <br><br><span class="end_photo_org"><img src="https://imgnews.pstatic.net/image/028/2025/08/31/0002763872_004_20250831120210635.jpg" alt="" /><em class="img_desc">황시운 작가</em></span> <div style=" position: relative; margin: 20px 0; border-radius: 15px; padding: 30px; background-color: #F8F8F8;"><div style="font-size: 18px; line-height: 2.1; word-break: keep-all; word-wrap: break-word;"><b>황시운 작가 </b>l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홈 Home’ ‘그래도, 아직은 봄밤’, 장편소설 ‘컴백홈’, 산문집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다. 창비장편소설상(2011년)을 수상했다.</div></div> 관련자료 이전 "우리 선수들 집에 가기 싫다고, 정말 좋은 경험 될 듯"…'OK 읏맨 럭비 아카데미' 2박3일 '대만족' 08-31 다음 '재력 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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