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까지 아들 탓... 조선 역사상 '최악의 미치광이' 만든 왕 작성일 09-10 6 목록 <div id="layerTranslateNotice" style="display:none;"></div> <strong class="summary_view" data-translation="true">[리뷰]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2></strong> <div class="article_view" data-translation-body="true" data-tiara-layer="article_body" data-tiara-action-name="본문이미지확대_클릭"> <section dmcf-sid="ZIwEBBiBz6"> <p contents-hash="ac403aed2c72aac5fe32a271a9e43c867ed7403d73afe43b190d4942498d61a6" dmcf-pid="5x4Vhhph08" dmcf-ptype="general">[이준목 기자]</p>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8f3081a4021a9c40736340a21c7286bfd34cb7fdd07dbeef381f7ca9af561836" dmcf-pid="1M8fllUlp4"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09/10/ohmynews/20250910113603343nwar.jpg" data-org-width="1280" dmcf-mid="HxhOffNfUQ"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9/10/ohmynews/20250910113603343nwar.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벌거벗은한국사2</strong> 연산군과 사도세자</td> </tr> <tr> <td align="left">ⓒ TVNSTORY</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00c82d07a6b8b0108931b7255afb9a9d3128caeddfc09595263dd98c0c43cd47" dmcf-pid="tR64SSuSpf" dmcf-ptype="general"> 연산군과 사도세자, 두 인물의 공통점은 본래 태어날 때부터 '왕이 될 존귀한 운명'을 타고났음에도, 어긋난 광기로 인생이 추락하게 되면서 끝내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조선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또 한 사람은 친아버지의 손에 처형당하는 비운의 세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두 사람은 어쩌다가 250여 년의 세월을 두고 나란히 '조선 역사상 최악의 미치광이 금쪽이'라는 오명까지 쓰게 되었을까. </div> <p contents-hash="04bf16922b2c6586a258a3af7344119e45bbddbc63bcbb38389ec5d1d6ffe7dc" dmcf-pid="FeP8vv7vpV" dmcf-ptype="general">9월 9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2> 첫 회에서는 '왕실 최악의 미치광이, 사도세자 VS 연산군'편이 그려졌다.</p> <p contents-hash="00cd81423df1b4f471aa1a6d69a47b7f4531eb60c7da09c661fda012813f4494" dmcf-pid="3dQ6TTzTp2" dmcf-ptype="general">연산군은 1476년 12월 2일, 조선 9대 국왕 성종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도세자는 1735년 2월 13일, 조선 21대 국왕 영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연산군은 성종과 중전이던 폐비 윤씨 사이에서 난 '적장자'였고, 사도세자는 형인 효장세자가 요절하면서 아버지 영조가 무려 42세의 늦은 나이에 다시 얻은 아들이었다. 연산군은 불과 7세, 사도세자는 조선 역사상 15개월 만에 세자에 책봉될 정도였다. 그만큼 두 사람은 출생 당시부터 왕의 후계자가 될 운명을 타고난 특별한 존재로 왕실의 기대와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p> <p contents-hash="58d563a4b84a4e1d7fe69e9fb0bb1a69741daa1a30df15d2a55d92938791b9cc" dmcf-pid="0JxPyyqy09" dmcf-ptype="general">또한 부친인 성종과 영조는 역대 조선 국왕 중에서도 학문을 좋아하는 모범생으로 유명했던 군주들이다. 이들은 아들들에게도 자신의 후계자에 걸맞는 자질을 갖출 것을 원했고, 조기 교육을 통하여 어릴 때부터 완전무결하게 준비된 국왕으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주변의 지나친 기대와 압박은 오히려 연산군과 사도세자에게는 독으로 작용했다.</p> <p contents-hash="d56d137c7bbab487338a267337295d1c1cc3e93bdd67249c7ac384d4a6a2f083" dmcf-pid="piMQWWBW7K" dmcf-ptype="general"><strong>주변의 기대와 압박이 독이 된 연산군과 사도세자</strong></p> <p contents-hash="abb06c87cd38d441c6fad93f088e90aec54fbe0a7bb71ca429cdbbed3442e9b1" dmcf-pid="Ux4VhhphFb" dmcf-ptype="general">연산군은 1495년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 뒤를 이어 불과 19세의 나이로 조선 10대 국왕에 등극한다. 연산군은 왕위에 오른 후 서서히 독선적이고 고집이 심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p> <p contents-hash="feb729fb4dc9640294dbc53428ec6c6bb6b4d59a85d6b18f3a4ceb23630f8b7e" dmcf-pid="uM8fllUl7B" dmcf-ptype="general">선왕인 성종은 유교 정치를 추구하며 사림파(士林派)를 대거 등용했으나, 성종 후기부터 신하들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커지면서 왕권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신하들은 연산군 즉위 후에도 선왕 성종과 비교하면서 연산군의 행보에 사사건건 딴지를 걸었다. 이에 연산군은 왕권을 무시하는 불경한 신하들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이 깊어지게 된다.</p> <p contents-hash="0f40b39ceb35aadd43b35930ec6ea6597276c32aa44f758a89886c1aa83be8a0" dmcf-pid="7R64SSuS3q" dmcf-ptype="general">1498년(연산군 4년), 피바람의 시작이 되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발생한다. 연산군이 조정대신들을 숙청한 사건으로 조선 최초의 사화이기도 하다. 무오사화는 성종실록을 편찬하던 사림파 사관들이 연산군의 증조부인 세조(조선 7대국왕)의 왕위찬탈을 은유적으로 비판하는 사초를 작성했다는 의혹에서 비롯됐다. 이는 세조의 직계 후손인 연산군 입장에서는 자신과 아버지 성종을 비롯하여 왕실의 정통성 자체를 부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사건이었다.</p> <p contents-hash="5465d1e39b89dd542400f66099968da94b36d2d40bbb70b3cd6df684bd8e07b6" dmcf-pid="zeP8vv7vpz" dmcf-ptype="general">분노한 연산군은 사초를 작성한 김일손을 능지처참하고 관련자들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무덤을 파고 시체를 베는 부관참시까지 자행했다. 또한 이 사건은 연산군에게 더 이상 자신에게 거슬리는 세력과는 설득하거나 논쟁할 필요 없이 제거해버리면 된다는 광기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된다.</p> <p contents-hash="9c7206bf342827fdbf2176920a8e7b95f16c02b1307ef910b0be6c759480459c" dmcf-pid="qdQ6TTzT07" dmcf-ptype="general">여기에 연산군은 이번엔 생모 '폐비 윤씨 사건'을 다시 꺼내든다. 윤씨는 남편 성종과의 갈등으로 중전에서 폐위되었고 끝내는 사사까지 당한 비운의 왕비다. 뒤늦게 친모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된 연산군은 복수심에 불타오르게 된다.</p> <p contents-hash="47a0a4bb1589912a14baf96f7266ee0e7877b9124ed4284e002887741dd605c0" dmcf-pid="BJxPyyqypu" dmcf-ptype="general">어머니 윤씨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던 성종의 후궁 엄씨와 정씨를 끌어내 잔혹하게 폭행하고 그 아들들까지 처형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할머니 인수대비(성종의 모친) 역시 며느리 윤씨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손자 연산군으로부터 집요한 괴롭힘을 당하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야사에서는 연산군이 인수대비의 가슴을 머리로 들이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했다.</p> <p contents-hash="1e33d53bd5e75054d59372f923067b09db90d43705c58af83c180813636ff156" dmcf-pid="biMQWWBW7U" dmcf-ptype="general">이 무렵에 이르면 연산군은 자신의 비위를 거슬리는 인물들은 누구든 사소한 일로 죄를 물어서 잔혹하게 처형하는 것으로 악명을 떨친다. 한 신하는 '시를 한 수 지어보라'는 왕의 명령에 잘 보이려고 두 수를 지었다는 황당한 이유로 2년이나 지난 뒤에 다시 죄를 물어 숙청당했다. 또한 연산군은 세자 시절에 자신을 꾸짖으며 야단쳤던 스승 조지서 역시 과거의 앙심으로 죄를 물어 처형할만큼 집요하고 뒤끝이 심한 성격이었다고 한다.</p> <p contents-hash="99a77d1ee99fbb69a6b193f66a8da854f581e14e39bdcfa0ebb778cc385d81fb" dmcf-pid="KnRxYYbY0p" dmcf-ptype="general"><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연산군이 신하의 죄를 물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내뱉은 말이 능상(凌上, 윗사람을 능멸한다)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왕권에 대한 연산군의 집착과 피해의식이 대단히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p> <p contents-hash="84936cdf4577c9bc9e8a4a26d570ec0f57e2c990fd1f425f01c21d18e0670f51" dmcf-pid="9LeMGGKGU0" dmcf-ptype="general">절대권력을 거머쥔 연산군은 술과 유흥에 깊이 빠졌다. 연산군은 채홍사(採紅使)을 파견하여 전국에서 미모와 가무가 뛰어난 여인들은 기생에서 유부녀까지 가리지 않고 궁으로 불어들여 왕실의 기생인 흥청(興淸)으로 삼았다. 연산군의 개인적 유흥과 욕구를 위하여 나라의 재물을 탕진하면서 '흥청망청'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p> <p contents-hash="5d13956c642a47292b384c5a0ab38aee1dc7d6afa7153ccadabb603b7f834bbd" dmcf-pid="2LeMGGKG73" dmcf-ptype="general">1506년 9월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 연산군은 결국 폐위되고 이복동생인 중종이 등극한다. 연산군은 조선 역사상 최초로 신하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폐위된 왕이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반정 성공 이후 연산군은 교동으로 유배되었고, 같은 해 불과 두달만에 유배지에서 숨을 거둔다. 당시 연산군의 나이는 불과 30세였다. 이를 두고 독살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으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연산군은 후대까지 '조선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라는 오명을 남겼다.</p> <div contents-hash="a7d7953009599cd144c6094f6c12b2fdbf1d2520d44e79bd038c2938b88c677c" dmcf-pid="VodRHH9H0F" dmcf-ptype="general"> <strong>완벽주의자였던 영조... 점점 움츠러들게 된 사도세자</strong>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01d9830792c99564659c1c0e7993741b9cc1654414be761343a838ce70b4cd8e" dmcf-pid="fgJeXX2XUt"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09/10/ohmynews/20250910113604635mjqu.jpg" data-org-width="1280" dmcf-mid="XlOm22g23P"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9/10/ohmynews/20250910113604635mjqu.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벌거벗은한국사2</strong> 연산군과 사도세자</td> </tr> <tr> <td align="left">ⓒ TVNSTORY</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4cc72741f55031affddafc943db74f43301533daf8a0c2ae13bacdb736ae883f" dmcf-pid="4aidZZVZ31" dmcf-ptype="general"> 연산군의 비극이 어머니에서 비롯되었다면, 사도세자의 비극은 아버지와의 관계였다.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는 친모 숙빈 최씨가 비천한 무수리 출신이었고, 선왕이었던 이복형 경종의 독살 의혹까지 불거지며 평생 '정통성 컴플렉스'에 시달렸다. 그래서 영조는 자신의 왕권과 정통성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평생 노력했고, 아들 역시 자신처럼 완벽한 자질을 지닌 왕이 되기를 원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불과 3세 때부터 후계자 교육을 실시했다. </div> <p contents-hash="a61f7bcb9335c2c75e4025e2a28f45a5eebddd38b3fab3bd8764e1a743c1148f" dmcf-pid="8NnJ55f505" dmcf-ptype="general">하지만 사도세자는 완벽주의자였던 영조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영조는 어릴 때부터 사도세자의 학업과 행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무섭게 질책하고 면박을 줬다.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기록한 <한중록>에 따르면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어려운 것을 일부러 물어보시니, 더욱 두렵고 겁이 나서 대답을 못하면 남이 보는데서 꾸중하고 흉을 보셨다'고 설명하고 있다.</p> <p contents-hash="850db25a936a19b5f878c6a5ef79a9a5862351a3e3be94ecade9989985a3ce5d" dmcf-pid="6jLi11410Z" dmcf-ptype="general">이는 영조가 미래의 신하들 앞에서 후계자가 될 사도세자에게 노골적으로 망신과 창피를 준 것이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아동학대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본래 총명했다는 평가를 받던 사도세자는 점점 영조의 눈치를 보며 움츠러들게 된다.</p> <p contents-hash="aee800d62a199838b512231cae056dd37657cb1ebbe4227051b7837724fdab61" dmcf-pid="PAontt8tzX" dmcf-ptype="general">영조는 사도세자가 어느 정도 장성하자 대리청정(代理聽政, 왕의 직무를 대행하게 함)을 맡겨 자질을 확인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영조는 대리청정을 지시해놓고도 사도세자가 소신대로 국정을 처리하려고 할 때마다 번번이 가로막는가 하면, 정작 영조에게 상의를 하면 사소한 일도 직접 결단하지 못한다고 질책하는 등, 사도세자가 어떻게 하든 못마땅해하며 꾸중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영조는 자연 현상인 날씨가 좋지 않은 것조차 사도세자의 책임으로 돌리며 화를 냈다고 한다. 사도세자 역시 그런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서운함이 계속해서 쌓였다.</p> <p contents-hash="2b3fe9f2960f1af69c24c44eb904efd60023edc021f240d0d9e7c999d6bf0d33" dmcf-pid="QcgLFF6FpH" dmcf-ptype="general">또한 영조는 사도세자가 4살 때이던 1738년부터 무려 네 차례나 왕위를 물려주겠다며 '양위 파동'을 벌였다. 이는 영조의 진심이 아니라, 사도세자와 신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해보기위한 정치적 퍼포먼스였다. 양위를 반대하지 않거나 찬성한다면 이는 곧 영조에게 불효·불충하다는 누명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양위파동이 벌어질 때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하며 혼신의 힘을 다하여 양위를 만류해야 했다. 아버지의 끊임없는 시험과 냉대 속에서 사도세자는 비참하고 원통한 기분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p> <p contents-hash="55b639aad2c0fb46eb3d59a3064d99e4fbf8f2b3835a257065e259201b20619f" dmcf-pid="xtHYddsdzG" dmcf-ptype="general">오랜 세월 극심한 스트레스로 벼랑 끝에 몰린 사도세자는 급기야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사도세자는 스스로 우물에 빠져 죽겠다며 소란을 피우는가 하면, 옷을 입을 때마다 불안을 느끼는 '의대증'을 앓게 된다. 또한 주변의 궁인과 관리, 아끼던 후궁까지 잇달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하는 만행을 저지르며 사도세자의 광기는 점차 통제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당시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들만 약 백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p> <p contents-hash="463a7702d01cfaca0feb692fea4ab09b8582443efc4676e030978f1cb7479156" dmcf-pid="yodRHH9H7Y" dmcf-ptype="general">뒤늦게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영조는 1762년 7월 5일, 사도세자를 궁궐로 불러들여 세자에서 폐위시키고 뒤주에 가둔다. 사도세자는 끝내 뒤주에서 나오지 못하고 8일 만에 아사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 사건이 바로 임오화변(壬午禍變)이다. 국왕이 자신의 친아들이자 후계자를 이토록 비인륜적인 방법으로 제거한 사례는 세계 역사에서도 드물다.</p> <p contents-hash="f4e4d8e9d64fa1f59002cdc5840c9cea4390512d344b7100dac35e5ff43a6bc4" dmcf-pid="WgJeXX2X7W" dmcf-ptype="general">오늘날 학계에서는 임오화변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사도세자의 광증보다도, 오히려 아버지 영조의 편집증적인 성격장애와 왜곡된 부정에 더 문제가 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 사건은 조선 왕실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자, 훗날 영조의 후계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삶과 정통성에까지 큰 그늘을 드리우게 된다.</p> <p contents-hash="9de90c01b00bd7cfa8d1cb06b9b4ea7c9ed50a533d5eb5ad8a81a05057e0ffc2" dmcf-pid="YaidZZVZ0y" dmcf-ptype="general">'불행한 가정사와 성장환경'에서 비롯된 업보가 한 개인의 삶을 망친 것은 물론이고, 국가의 역사마저 흔들어 놓는 비극이 되었다는 것은, 연산군과 사도세자 두 금쪽이의 안타까운 공통점이 아닐까.</p> </section> </div> <p class="" data-translation="true">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p> 관련자료 이전 무기산업 넘어 일자리 창출…경기도, 방위산업 새 길 모색 09-10 다음 이병헌, 토론토영화제 특별공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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