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운명을 바꾼 두 남자의 복수 작성일 09-24 28 목록 <div id="layerTranslateNotice" style="display:none;"></div> <strong class="summary_view" data-translation="true">[리뷰] tvN 스토리 < 벌거벗은 한국사2 ></strong> <div class="article_view" data-translation-body="true" data-tiara-layer="article_body" data-tiara-action-name="본문이미지확대_클릭"> <section dmcf-sid="5oUxKcA8Fi"> <p contents-hash="ac403aed2c72aac5fe32a271a9e43c867ed7403d73afe43b190d4942498d61a6" dmcf-pid="1guM9kc60J" dmcf-ptype="general">[이준목 기자]</p> <p contents-hash="0030350df2238e07be9a23bac17e777342967392f71ec6831d51265a0957223c" dmcf-pid="ta7R2EkPUd" dmcf-ptype="general">백제 의자왕과 신라 무열왕은 한민족의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군주들이자 세기의 라이벌로 꼽힌다. 동시대에 경쟁했던 두 사람은, 각각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한 승자와, 망국의 군주가 된 패자로 운명이 엇갈렸다. 두 남자가 운명적인 숙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건 피로 얼룩진 양국의 역사가 빚어낸 '복수심' 때문이었다.</p> <p contents-hash="ac42f5f56e0a5981db82f789e08daa9d5500c66d6261d57e5fe52739f4fbfdda" dmcf-pid="FNzeVDEQue" dmcf-ptype="general">9월 23일 방송된 tvN 스토리 < 벌거벗은 한국사2 >에서는 '두 남자의 피맺힌 복수극, 의자왕 vs. 김춘추'편이 그려졌다.</p> <div contents-hash="a1e355e00b05a3d467adccdf40f862c475ee0fcaedca186d9d461e77fad133b5" dmcf-pid="3jqdfwDx0R" dmcf-ptype="general"> <strong>백제와 신라</strong>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c85bd149d7a51c7fa5175349a0b6b9355f0abe331b69eb6523a22122896fb742" dmcf-pid="0ABJ4rwM3M"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09/24/ohmynews/20250924154802669cclg.jpg" data-org-width="1280" dmcf-mid="XyzeVDEQuL"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9/24/ohmynews/20250924154802669cclg.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strong> 의자왕과 김춘추</td> </tr> <tr> <td align="left">ⓒ tvnstory</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c87de9147ff9322d3455e153623057e81ffa934bb9c29660bd7302bfe2cc8402" dmcf-pid="pkKn6sme7x" dmcf-ptype="general">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 중남부에서 오랫동안 경쟁과 협력을 오갔던 사이였다. 양국은 4세기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맞섰다. 551년 백제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탈환했다. 본래 이 지역은 백제의 영역이었고, 양국은 승전 이후 백제가 한강 하류 지역을, 신라가 상류 지역을 나눠 가지는데 합의한 상태였다. </div> <p contents-hash="373d8e51d72bc92b60bf0f0525686dd9c27a8e4f1d194f0e98eb7cdf8f52e923" dmcf-pid="UE9LPOsdzQ" dmcf-ptype="general">하지만 신라가 약속을 깨고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면서 나제동맹은 120년 만에 파탄난다. 신라의 배신에 분노한 성왕은 신라를 침공했으나 전투 중에 허무하게 전사하고 만다. 심지어 신라는 성왕을 참수하고 그 머리를 신라의 귀족들이 오가는 관청인 북청 건물 계단 아래 묻으며 사후까지 백제에 모욕을 가했다.</p> <p contents-hash="7652ce1cb6880e6a197168aeacf22fbb69a89c51d3ab2e8fa5a1837a386f08a6" dmcf-pid="uD2oQIOJFP" dmcf-ptype="general">이로써 백제와 신라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고, 후대 백제왕들은 성왕의 죽음을 기억하며 뼛속 깊이 신라에 대한 복수심을 새기게 된다. 이는 의자왕 역시 마찬가지였다.</p> <p contents-hash="82a95f419b93e4e07bf19bafc8451c647c0ff4c71f980cb8530709ebd768e6b9" dmcf-pid="7wVgxCIiF6" dmcf-ptype="general">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 군주로서 나라의 멸망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역사에서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강했다. 지금도 의자왕 하면 '삼천궁녀'를 거느렸다는 사치스럽고 방탕한 이미지를 떠올릴 정도다. 실제 의자왕에 대한 당대의 평판은 달랐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 '의자왕은 무왕(백제 30대 국왕)의 맏아들로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들과도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 라 불렸다'고 기록하고 있다.</p> <p contents-hash="39dbed951089e965d0fb502defb2b5993d5e1f4cfb4893511039f1a70755c4e9" dmcf-pid="zrfaMhCn08" dmcf-ptype="general">의자왕은 641년, 아버지 무왕의 뒤를 이어 백제의 31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당시 의자왕의 나이는 이미 40대 후반이었다.</p> <p contents-hash="c41f3e573ed4aba346b9188216a275cdb9b77d9ae8d5836dc7a97ddab55c2fa3" dmcf-pid="qm4NRlhLz4" dmcf-ptype="general">의자왕은 즉위 이듬해인 642년 신라를 공격하여 무려 40여 개의 신라성을 함락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백제군은 신라의 요충지인 대야성을 정복하며 성주인 김품석과 아내 고타소를 살해하고 두 사람의 머리를 백제의 죄수들이 지나다니는 감옥의 바닥에 묻었다고 한다. 백 년여 전 성왕을 살해하고 고인모독까지 자행했던 신라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아 준 복수였다. 신라에 설욕하며 백제의 자존심을 회복한 의자왕의 명망은 크게 높아진다.</p> <div contents-hash="2162aec5cf6e52c2d821f73ebad9494e572943b8881e63fd82f96c9e70ac2ed1" dmcf-pid="Bs8jeSlo0f" dmcf-ptype="general"> <strong>신라 왕실의 실세 김춘추</strong>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fb3d80d7ad0f8dc13fb3d624422d452308e3b5e67ea9299cd71a2adcd4211420" dmcf-pid="bO6AdvSgFV"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09/24/ohmynews/20250924154803947fwts.jpg" data-org-width="1280" dmcf-mid="Z2lpG68t7n"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9/24/ohmynews/20250924154803947fwts.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strong> < 벌거벗은한국사2 ></td> </tr> <tr> <td align="left">ⓒ tvnstory</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8f50a99d229ab44dd1acc3abaaae2d26baf43cd3b4812d50d4aa6366159895a4" dmcf-pid="KIPcJTvau2" dmcf-ptype="general"> 그리고 신라에도 이런 의자왕에게 강렬한 복수심을 품은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후에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였다. </div> <p contents-hash="0a2159b073ebc5cf35c1c97009dd8da9d5b5afc37f851e70856aa24fdcd75133" dmcf-pid="9ABJ4rwMF9" dmcf-ptype="general">김춘추는 신라 25대 진지왕의 손자였지만, 진지왕이 귀족들에 의하여 폐위당하고 조카인 진평왕이 즉위하면서 왕위 계승 순위에서 밀려났다. 신라의 신분제인 '골품제'에서 김춘추는 왕이 될 수 없는 '진골'에 속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김춘추는 본인의 힘으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선덕여왕 시대에 이르면 고위직을 역임하며 신라 왕실의 실세로 떠올랐다.</p> <p contents-hash="bd3d154393dc99bfa8a02b86eb8dc7995eadb987ab7a948ba2deed78cd2180a9" dmcf-pid="2cbi8mrRzK" dmcf-ptype="general">대야성 전투에서 백제에 살해당한 고타소-김품석 부부는 따로 김춘추의 딸과 사위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소식을 듣고 큰 충격에 빠진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서 하루 종일 눈도 깜빡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p> <p contents-hash="ce37664b03f8049ac934e3a38faac5f1607904fb693d10f1050977c8f4bcee13" dmcf-pid="VkKn6smeub" dmcf-ptype="general">설상가상 김춘추는 사위를 성주로 임명하며 대야성을 상실한 책임을 물어 정치적으로도 곤경에 놓이게 된다. 이래저래 백제에 원한이 깊어진 김춘추는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고 부르짖으며 처절한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p> <p contents-hash="abcb9e40455907abe9e19101055864357f1c225821a797d1e2afd33eb70a9ad7" dmcf-pid="fE9LPOsd3B" dmcf-ptype="general">단독으로 백제를 응징할 만한 군사력이 없었던 신라는 외교로 돌파구를 모색해야 했다. 김춘추는 직접 외교관으로 나서서 동분서주했다. 먼저 고구려에 손을 내밀었지만 , 당시 연개소문이 실권을 쥐고 있던 고구려는 한강 유역 땅을 반환하라는 신라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요구하면서 협상은 결렬된다. 김춘추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고구려를 빠져나왔다.</p> <p contents-hash="c5d6e29858448b376fca1d74feeab729536754c5f42775b7fe809eeb9dbc129c" dmcf-pid="4D2oQIOJzq" dmcf-ptype="general">하지만 김춘추는 포기하지 않고 이번엔 중국의 당나라를 찾아간다. 당시 당나라는 태종의 통치하에 한창 번성하던 시기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당 태종은 김춘추의 풍채를 보고 범상치 않은 인상을 받았는지 '신성한 사람이라 하고, 본인의 시위(호위하는 자)로 삼고 싶어했다'고 한다.</p> <p contents-hash="2cef24c1b7f2cc003651c850208280b72a6e19cf0ea165f6baa0473046da422b" dmcf-pid="8wVgxCIiUz" dmcf-ptype="general">김춘추는 뛰어난 언변과 타고난 정치감각으로 당태종을 설득한다. 당시 동아시아 최강국이던 당나라가 유일하게 굴복시키지 못했던 고구려 정복은 당 태종의 숙원이었다. 이를 간파한 김춘추는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며 백제를 먼저 정복하고, 이어서 당의 고구려 정복을 돕는다는 조건을 제시하며 협상에 성공한다. 김춘추의 외교력에 힘입어 한반도 역사를 뒤흔들게 되는 '나당동맹'이 체결된다.</p> <p contents-hash="301c7feedf92ba6b896c8a98e0553c21773457aef2c45d349c4949355aeac8e6" dmcf-pid="6rfaMhCn77" dmcf-ptype="general">654년, 신라 왕실에서는 진평왕계가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두 여왕을 끝으로 후사가 없어서 성골 왕통이 단절되었다. 진골이던 김춘추가 그 뒤를 이어 왕위계승 1순위로 올라서면서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에 등극한다. 무열왕은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어온 백제를 향한 '피의 복수'를 시작한다.</p> <p contents-hash="5226ecb756363e190d54b5ddd2f5e117d621cd024aca264f7a9c18b648a52dcd" dmcf-pid="Pm4NRlhLpu" dmcf-ptype="general">당시 백제 내부는 의자왕이 직계 친족인 왕족들을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다가 귀족 세력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여기에 의자왕은 왕비인 은고에게 휘둘려 즉위 초기의 패기와는 달리 국정을 소홀히 하고 사치와 방탕을 일삼으며 민심을 잃었다고 한다.</p> <p contents-hash="c8c544c540fe6a680f69d8893d3988eed0f7d04eb7c1cca20675f3539a9fd476" dmcf-pid="Qe1fuoLKpU" dmcf-ptype="general">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18만 나당연합군이 마침내 백제를 침공한다. 나당연합군의 백제정벌은 그야말로 철통 보안 속에 극비리에 진행됐고, 백제는 당나라가 쳐들어올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p> <p contents-hash="708d964be22c53775d4806ee7b0c3dd1f160e34b0229a2bd53a36fed572c7882" dmcf-pid="xdt47go9zp" dmcf-ptype="general">수륙 양면에서 협공을 당하게 된 백제군은, 수적 열세 속에 당군과 신라군 중 어느 쪽을 먼저 요격하는 데 집중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신하들의 의견이 엇갈렸지만, 패닉에 빠진 의자왕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 사이에 당군이 별다른 저항 없이 해상 요충지인 기벌포에 상륙하면서 백제군은 요격할 수 있는 타이밍마저 놓치게 된다.</p> <p contents-hash="ecba1efa3b5bbade9ea3a3a20a7124996c85bbbe1bca3cb96cd487c9b57a63ae" dmcf-pid="yHohkFtsU0" dmcf-ptype="general">다급해진 의자왕은 그제야 주력부대를 기벌포로 당군을 막는 데 보내고, 장군 계백에서는 5천명의 결사대를 주어 동쪽에 침공해오는 신라군을 저지한다. 계백의 결사대는 분전했지만 결국 병력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멸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황산벌 전투'다.</p> <p contents-hash="17c5d8e715cc32c7287813f7f657584928c2c444c3a1b630e9c50efc4d9db0d0" dmcf-pid="WXglE3FO03" dmcf-ptype="general">기벌포와 황산벌에서 모두 패배하여 궁지에 몰린 의자왕은 수도 사비성을 버리고 웅진성으로 도주했지만, 신하들의 배신으로 결국 나당연합군에 항복하게 된다. 700년 가까이 이어져 왔던 백제의 역사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p> <p contents-hash="df280e7c4afeb6ab15172b2074ff8d1cba646471fdc093ff09670c32a2e513dd" dmcf-pid="YZaSD03I0F" dmcf-ptype="general">의자왕의 패인은 신라와의 관계에서 한때 우위를 점했다고 방심했고, 국제 정세를 냉철하게 파악하지 못하며 내부 분열과 국정의 문란을 초래한 데 있었다. 무열왕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난 후 성대하 승리 축하연을 열었고, 의자왕은 초라한 죄인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 끌려 나오게 된다.</p> <p contents-hash="d5277c9f1fdc7d729cea57f432521144b4a821635ab67d0925652838a815dfad" dmcf-pid="G5Nvwp0C7t" dmcf-ptype="general">무열왕은 조롱의 의미에서 술잔을 내밀며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게 했고, 의자왕은 백제를 멸망시킨 원수에게 순순히 술을 올려야 하는 비참한 순간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렇게 망국의 패자가 된 의자왕은 백제가 멸망한 그해 당나라로 끌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p> <p contents-hash="9e7168c11d1396bdf5d4638d645179b9951b6cbee89581909f3ddcf8088798be" dmcf-pid="H1jTrUph01" dmcf-ptype="general">무열왕은 이후 신라의 세력을 확장하며 삼국 통일의 기초를 다졌고, 신라는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의 시대에 이르러 고구려마저 멸망시키며 마침내 삼국통일을 완수하게 된다.</p> <p contents-hash="607683e5e8280c865dce988b9a3468bb6e50857ca5222399e5544f184e5cbebd" dmcf-pid="XtAymuUl35" dmcf-ptype="general">백제 성왕의 죽음을 시작으로 나당동맹에 의하여 백제가 멸망하기까지,약 백여년의 시간은 어쩌면 복수가 끊임없는 복수를 부르는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복수심 때문에 시작된 개인의 선택이 모여 국가의 운명에서 어쩌면 역사의 큰 흐름까지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의자왕과 무열왕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냉철한 교훈이다.</p> </section> </div> <p class="" data-translation="true">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p> 관련자료 이전 2025 서울 IPC 정기총회, 콘퍼런스 개막…집행위원회 포함 420여명 참가 09-24 다음 투어스, 24일 미니 4집 선공개곡 퍼포먼스 최초 공개 09-24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한 회원만 댓글 등록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