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역경의 성장 스토리' 시한부 인생 극복하고 충북 테니스 발전을 이끄는 충북테니스협회 이장희 회장 작성일 09-26 48 목록 <div style="text-align:center"><span class="end_photo_org"><img src="https://imgnews.pstatic.net/image/481/2025/09/26/0000011652_001_20250926124106879.jpg" alt="" /><em class="img_desc">이장희 충북테니스협회 회장</em></span></div><br><br>18살 고등학교 2학년인 이장희는 위암 선고를 받고 몸무게 27kg으로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은 1월의 한겨울. 그리고 지금도 그는 그 날을 "내 인생의 두 번째 생일"이라고 말한다. 이 기막힌 생존의 서사에서 시작된 그의 인생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장대한 다큐멘터리다. 40년 가까이 충북대학교 교수 로 재직했고, 정통 경영학 박사 2호라는 이정표를 세웠으며, 지금은 충북테니스협회장으로 지역 테니스 발전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이장희 회장의 이야기는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다. 그보다 더 깊고, 더 인간적이며, 어쩌면 조금은 '믿기지 않을' 이야기다.<br><br><strong>시한부 인생 극복,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strong><br><br>그의 학창시절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부모의 사업이 기울며 중학교 등록금조차 마련하기 어려웠고, 극단적인 선택까지 고민하던 가족을 구한 건 한독지가의 도움이었다. 학교에서도 갖은 수모를 겪었던 이 회장은 1등으로졸업하겠다는 다짐을 했다.<br><br>실제로 그는 죽기 살기로 공부했고,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해 명문 청주고에 진학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2학년 때 위암 판정을 받으며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br><br>"2학년 때 자꾸 탈이 나고 몸이 좋지 않았다. 카스테라 작은 한 조각도 소화를 시키지 못했다. 서울에 올라가 검진을 받았더니 위암 판정을 받았다. 끔찍했다. 연말이라 수술 일정이 잡히지 않아 이듬해 1월 겨우 수술을 받았다.수술 당시 27kg이었다."<br><br>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5년의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수술 이후 대학 진학은 커녕 삶 자체가 불확실해진 이 회장은 먹고 살기위해 공무원 시험을 택했다. 지금으로 치면 9급 공무원 시험이다. 전국 차석이었다. 인생의 끝이 정해진 이장희 회장은 하루하루 공무원의 삶을 이어갔지만 대학을 다니는 친구들을 보며 조금씩 마음에 변화가 왔다. '그래, 대학은 가보고 죽자'는 생각을 했다. 그 다짐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br><br>청주에서 초·중·고를 졸업한 이장희 회장은 친구들보다 2년 늦었지만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열심히 살아온 복인지 수술 후 5년이 지났지만 몸이 멀쩡했다. 새 삶을 얻었다.<br><br>1979년 대한전선에 취업 후 공부에 목 말라 있던 이장희 회장은 연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고, 1987년 대한민국 정통 경영학 박사 2호가 되었다. 지도교수는 당시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낸 송자 교수였다.<br><br>1981년 강단에 처음 서게 된 그는, 1982년부터 충북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40년을 가르쳤다. 학생처장을 거쳐 부총장까지 역임했으며, 80년대 초 군사정권 시절에는 군사 훈련을 받는 학생들을 돌보는 역할도 맡았다. "그땐 참 시대가 시대였죠. 학생들 데리고 집체교육도 가고, 학생과장으로서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br><br>특별한 인연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의 아버지가 교수로 임용 되어 같은 대학에서 함께 일하게 된 것. 더 특별한 인연은 바로 '중매쟁이' 도종환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통해 만난 아내다. 충북대 국어교육과 석사과정 중이던 아내와 6개월 만에 결혼, 지금은 두 자녀 모두 교수로 성장했다. 그의 약혼식과 결혼식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과 엮여 있는데 약혼일은 1983년 8월 7일, 이웅평 귀순 사건이 터진 날, 결혼식은 10월 9일, 아웅산 테러 사건 날이다. "웃지 못할 일이죠. 대한민국 격동기 속에서 인생도 휘몰아쳤습니다." 이 회장이 웃으며 말했다.<br><br><strong>취재로 알게 된 테니스, 이제 충북 테니스 책임지다</strong><br><br>이장희 회장에게 테니스와의 인연은 우연이었다. 성균관대 학보사 활동을 하던 중, 당시 선수였던 주원홍(현 대한테니스협회장) 선수를 인터뷰하게 되면서다. "그 전까지 테니스는 노인들 운동인 줄 알았어요." (웃음)<br><br>취재를 하며 테니스에 대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고 성대 수선관 앞에 있던 벽 앞에서 혼자 일명 '벽치기'로 테니스를 배웠다. "사실 테니스 레슨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고 탁구 했던 경험을 살려 테니스를 독학했다." 대학원 시절 마포 청기와 테니스장에서 동호회 활동을 했고 충북대 교수 시절에는 테니스 동아리 '에이스'를 만들어 30년간 지도 교수로 함께했다.<br><br>현재 그는 충북테니스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5년 전 협회장이 된 그는 재임한 올해 특히 '충북테니스 인프라 확충'에 집중하고 있다. 청주는 전국 시군 중 실내코트가 없는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다. 오송역 역전 개발 사업으로 실내코트 4면을 추진 중이다. 그 밖에 오창테니스코트 등 추가 정비 사업을 실시하는 중이다.<br><br>"목포나 익산만 가도 시설이 정말 좋아요. 충북도 테니스로 꿈꿀 수 있는 지역이 되게 하고 싶습니다."<br><br>충북의 또 하나의 과제는 유망주 유치다. 이 회장은 "충북은 괴산군청 등 실업팀도 있지만 중학교, 고등학교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약하다" 이어 "잘하는 선수가 나오면 각 지역 특히 테니스가 강한 지역에서 선수를 영입하려는 시도가 많다. 충북은 연식정구(소프트테니스) 강세 지역으로 충북대, 옥천군청 여자팀이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반면, 테니스는 조금 부족하다"고 했다. 작년 초등랭킹 1위였던 충주 출신 최민건도 다른 지역에서 큰 관심을 보였지만 충주에 남을 수있었다. 이 회장은 교육감과 협의해 최민건을 충주중에 진학시켜 테니스부를 신설했다. 또한 중앙여고 여자 테니스팀을 새로 만들었다.<br><br>"이제는 선수가 충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충북에서 자라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때입니다."<br><br>이장희 회장은 2년 전 충북 정책 사업인 '레이크파크 르네상스'에 착안해 레이크파크배 동호인 대회를 창설했고 올해로 3회째를 맞는다. 이 회장은 지역 기업의 후원을 받아서 동호인과 나아가 엘리트 테니스 대회를 더욱 확대할 계획이며 진천군에 있는 국가대표 진천선수촌과 협의를 통해 현장 방문 체험 등 유소년 선수들에게 꿈을 심어 줄 수 있는 이벤트도 기획하려고 한다.<br><br>이장희 회장의 인생은 테니스와도 닮았다. 매치포인트 위기에서도 몇 번이나 극복하며 경기를 이어가고 있다. 죽음을 이겨낸 사람, 다시 태어난 사람, 그리고 여전히 뛰는 사람. 그의 작은 체구에서 솟아 오르는 열정과 생명력이 충북 테니스 발전으로 이어지길 바란다.<br><br>[기사제보 tennis@tennis.co.kr]<br><br> 관련자료 이전 “고딩 때 프사가” 이영지도 경악한 카톡 업데이트…내부선 “시키는 대로 했다” 09-26 다음 이경규 "비빌 언덕 무너져"→딸 이예림 "한국 떠나야 하나"…약물운전 당시 심경 09-26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한 회원만 댓글 등록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