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로 몰린 남자의 최후 진술 후 벌어진 일 작성일 11-04 14 목록 <div id="layerTranslateNotice" style="display:none;"></div> <strong class="summary_view" data-translation="true">[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strong> <div class="article_view" data-translation-body="true" data-tiara-layer="article_body" data-tiara-action-name="본문이미지확대_클릭"> <section dmcf-sid="6SI0oprNu4"> <p contents-hash="ac403aed2c72aac5fe32a271a9e43c867ed7403d73afe43b190d4942498d61a6" dmcf-pid="PvCpgUmj0f" dmcf-ptype="general">[이준목 기자]</p>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e8f6b654e5f87c68f392a3a61db1f075183e1952243abd7842852149e6537846" dmcf-pid="QThUausAuV"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1/04/ohmynews/20251104115402245ekfq.jpg" data-org-width="1280" dmcf-mid="tl1C9hRf7A"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04/ohmynews/20251104115402245ekfq.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벌거벗은세계사</strong> 드레퓌스사건</td> </tr> <tr> <td align="left">ⓒ tvn</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a37d901e0516301c4dfd97776ed10e34e3c39270a28f4d7d8a602e1eafd63777" dmcf-pid="xyluN7OcU2" dmcf-ptype="general"> '드레퓌스 사건(1894-1906)'은 19세기 말 프랑스 사회를 강타한 희대의 간첩 스캔들이다. 이 사건은 '자유와 포용'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프랑스의 민주주의를 뒤흔들었고 이후의 세계사에까지 엄청난 나비효과를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div> <p contents-hash="68d8d8c18c693f1ca8f06d76b21a2d4dd1db9b0dd17ade5c453024d8da594d62" dmcf-pid="yx8c0k2uU9" dmcf-ptype="general">촉망받는 엘리트 군인이었던 드레퓌스는 어쩌다가 프랑스의 반역자로 취급받으며 간첩죄를 뒤집어쓰고 모친 고초를 겪어야만 했을까. 일개 장교가 연루된 간첩 사건이 어떻게 프랑스의 민주주의 발전과 이스라엘 건국에까지 영향을 미친 전환점이 되었을까.</p> <p contents-hash="3de316a02f6835ce6c41d622b2b45e6fd2fec7f2dffd8d57386cc55d3cf46dd4" dmcf-pid="WM6kpEV73K" dmcf-ptype="general">11월 3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이스라엘 건국의 씨앗이 된 간첩 스캔들' 편을 조명했다.</p> <p contents-hash="d361e9bc318a8690791645061aec681f18431eb837af946e9828bdeac8fc3b3f" dmcf-pid="YRPEUDfzFb" dmcf-ptype="general"><strong>극단적인 애국주의</strong></p> <p contents-hash="aa70a33dc24edc73c1931bd7c11f6b2de777b483f7b4f3ac4c1011145cbcda8d" dmcf-pid="GnesBOQ90B" dmcf-ptype="general">1894년 당시 프랑스는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1871) 패전의 여파로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제정 체제가 무너지고 제3공화국(1870-1940) 체제가 수립되었지만,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던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는 사회적 불만을 외부로 전가하려는 배타적이고 극단적인 애국주의 정서가 만연했다.</p> <p contents-hash="28976a59c3c8755fb813a7c4da3b42fc5982bae3293f62fc9f3d04103f5a10b6" dmcf-pid="HLdObIx2Uq" dmcf-ptype="general">당시 프랑스인들은 보불전쟁의 패배와 사회적 혼란의 원인이 내부의 반프랑스 세력 때문이라고 책임을 돌리는 목소리가 늘어났다. 이러한 프랑스인들의 분노가 집중된 표적이 '유대인'들이었다. 유럽의 대표적인 금융 재벌 가문으로 꼽히던 로스차일드 가문을 비롯하여 유대계는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경제와 종교적인 측면에서 프랑스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프랑스 사회에서는 이러한 유대인들을 둘러싼 각종 음모론과 배후설이 성행하면서 반유대 정서가 날로 높아지고 있었다.</p> <p contents-hash="b30b7ab79d16cf072418ba342eba7fe3eb284cdc7ffe57152edefcab475f25fc" dmcf-pid="XoJIKCMVFz" dmcf-ptype="general">1894년 9월 26일, 프랑스를 뒤흔들게 되는 드레퓌스 사건의 막이 오른다. 프랑스 정보국은 독일 대사관의 휴지통에서 프랑스의 군사기밀문서가 유출된 사실을 적발해낸다. 해당 문서에는 프랑스군의 대포 설계도와 야전포병 교범, 전투시 병력의 작전 위치 등 중요한 일급 기밀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프랑스군 내부에 기밀을 유출한 간첩이 있다는 정황이 유력했다.</p> <p contents-hash="a805da341ed00399427c965df63221dfe62592ddea6d2e15eb7ef187862a888f" dmcf-pid="ZgiC9hRfF7" dmcf-ptype="general">보불전쟁 패전 이후 위상이 추락한 프랑스 군부로서는, 적국인 독일에 군사기밀까지 유출된 사실이 드러나면 또 한 번 군의 명예가 크게 실추되는 것을 우려했다. 정보국 수사팀의 내사 결과 간첩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것은 알프레드 드레퓌스라는 인물이었다.</p> <p contents-hash="a8e5bd866953f87fa9471b08ec46e000a876b6b0d3919cc68a83da6dde67e281" dmcf-pid="5anh2le4uu" dmcf-ptype="general">사실 드레퓌스가 유력한 용의자로 부상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그의 '혈통과 출신' 때문이었다. 드레퓌스는 유대인이었고, 보불전쟁으로 독일에 병합된 알자스-로렌 지방 출신이었다. 이는 당시 프랑스의 반유대주의-반독일 정서와 맞물리며 드레퓌스에 대한 의혹을 높이게 된다.</p> <p contents-hash="9aa71d27e792fe7693b7fa5ad3b4672b6474bebbf7f0d9b8d94368390b613f09" dmcf-pid="1NLlVSd8zU" dmcf-ptype="general">프랑스 정보국은 유출된 군사기밀 문서와 드레퓌스의 '필체'가 흡사하다는 것을 유력한 근거로 내세웠다. 하지만 정작 드레퓌스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이에 군부는 이에 드레퓌스의 구속 사실과 유대인이라는 출신을 언론에 흘리며 그를 범인으로 몰아가려는 '마녀사냥'도 서슴치않았다.</p> <p contents-hash="5b70b04d630d12886ad9f10e7920f9ed02885ba53eed96b602b6346a8bace956" dmcf-pid="tjoSfvJ63p" dmcf-ptype="general">드레퓌스는 그해 12월 19일, 간첩 혐의로 비공개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군사재판은 드레퓌스의 방어권과 무기(증거) 대등 원칙을 무시하고 절차적으로 불공정한 밀실 재판으로 진행됐다. 또한 프랑스 정보국은 드레퓌스를 진범으로 몰기 위하여 각종 거짓 증언과 증거조작까지 저질렀다.</p> <p contents-hash="430d9184be893edd101f3cae4d51b398fbac8369cc4b8e1bf17835e273b5bef1" dmcf-pid="FAgv4TiPF0" dmcf-ptype="general">1894년 12월 22일, 1차 군사재판에서 만장일치로 드레퓌스는 반역죄가 인정되며 불명예제대와 프랑스에서의 추방을 통한 종신유배형이 선고된다. 드레퓌스는 "나는 프랑스를 사랑한다. 나는 결코 조국을 배신하지 않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항소도 기각되었다.</p> <div contents-hash="bd1bfe093288cfc49c60f6c4ee4bc25e9353fed03195d82956c235e5f3fabd92" dmcf-pid="3caT8ynQ73" dmcf-ptype="general"> <strong>드레퓌스가 겪은 일</strong>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0522449eee61ac750850c2a72d7f1ab2b33443905a087ccceb2d17c14424251a" dmcf-pid="0joSfvJ6UF"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1/04/ohmynews/20251104115403609kqgn.jpg" data-org-width="1280" dmcf-mid="88KoZgztp8"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04/ohmynews/20251104115403609kqgn.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벌거벗은세계사</strong> 드레퓌스사건</td> </tr> <tr> <td align="left">ⓒ tvn</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44570fea09f1922b54eeb277b862bfbd3fbd470bf1dada9c5fa624246788c941" dmcf-pid="pAgv4TiPFt" dmcf-ptype="general"> 이듬해인 1895년 1월 5일, 파리 에콜 밀리테르 중앙광장에서 프랑스군과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드레퓌스의 강등식이 열렸다. 드레퓌스는 군인의 명예를 상징하는 계급장과 장식, 칼을 뜯기고 빼앗기는 공개적인 굴욕을 당했다. 이후 드레퓌스는 프랑스령 남아메리카 기아나의 외진 '악마섬'에 유일한 죄수로 유배당하며 홀로 많은 고초를 겪어야했다. </div> <p contents-hash="addfedbfb86131b589d1bc9668caaf3935dd44ab36b1cefe7dd577c5d256824c" dmcf-pid="UcaT8ynQu1" dmcf-ptype="general">그렇게 종결된 줄 알았던 드레퓌스 사건은 얼마 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896년 3월, 프랑스 육군 정보국 중령이었던 마리 조르주 피카르는, 또 다른 군사기밀 문서 유출과 스파이의 존재를 파악해 내며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을 다시 규명하는 계기가 된다.</p> <p contents-hash="58d587bfb2415260be46189914e430df24a86f3202694bf2a669788ca07d8c43" dmcf-pid="ukNy6WLx35" dmcf-ptype="general">사건의 범인은 프랑스 육군 소령인 페르디낭 발생 에스테라지라는 인물이었다. 피카르는 드레퓌스 사건을 재조사하다가 유출된 군사기밀 문서와 에스테라지의 필체가 동일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에스테라지는 군 내부에서도 평판이 나빴고 도박으로 많은 빚을 지고 있던 문제아였다.</p> <p contents-hash="52517e2c4acd4d523348340bf1a75560769f29c18815eb36d9632e0011aa219f" dmcf-pid="7EjWPYoMUZ" dmcf-ptype="general">피카르는 간첩사건의 진범이 드레퓌스가 아니라 에스테라지임을 상부에 보고했다. 하지만 군의 명예 실추를 우려한 프랑스 군부는, 오히려 피카르를 좌천시키고 사건의 진실을 덮으려고 했다. 1898년 1월 에스테라지는 마침내 군사 법정에 서게 되었지만, 현역 장교들로 구성된 재판관들은 불과 재판 시작 3분만에 에스테라지에 일방적인 무죄를 선고했다.</p> <p contents-hash="ffc05cc7ccdf66c67d6b0410fd6395364127a42153e7042fa992eb90bfc870d2" dmcf-pid="zDAYQGgRpX" dmcf-ptype="general">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 규명에 앞장선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신문 기고를 통하여 프랑스 대통령에 보내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공개 편지를 올리며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 은폐한 혐의를 받는 군부 인사 10여 명을 실명으로 고발하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군부의 행태를 비판했던 졸라는 1898년 2월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서 유죄와 징역형을 받았고, 반드레퓌스파들의 살해협박에 시달리다가 결국 영국으로 망명한다.</p> <p contents-hash="9fecd28840ec22c8ac91b21dafc2c4fb37bec6ea2c70822ddf71df6bf0ece52d" dmcf-pid="qwcGxHaeUH" dmcf-ptype="general">이제 드레퓌스 사건은 단순한 간첩스캔들을 넘어서 '프랑스의 진정한 정의와 민주주의'에 관한 논쟁으로 확대됐다. 프랑스 사회는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와, 유죄를 주장하는 반드레퓌스파로 완전히 분열되며 엄청난 혼란에 휩싸인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하여 프랑스 곳곳에서 집회와 충돌이 속출했고, 1898년부터 1904년까지 공개적인 결투(Dual)만 40여차례나 일어났다고 한다.</p> <p contents-hash="d12e592b0a2c00f1d662db0b83168c72376e50eab18dfae0d534cfe431451421" dmcf-pid="BrkHMXNdFG" dmcf-ptype="general">드레퓌스 사건의 증거조작과 여론몰이를 주도했던 프랑스 정보국 소령 위베르 조제프 앙리는, 피카르의 수사로 조작 혐의가 드러나 체포된다. 그는 군사시설에 수감되고 불과 다음날 의문의 자살로 생을 마감하며 큰 충격을 안겼다.</p> <p contents-hash="a1273812264ae657dc5245b770e23fc6c30b49a231b7c04312947b78304ac74e" dmcf-pid="bCmtiFEoUY" dmcf-ptype="general">앙리의 사망으로 프랑스 군부가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한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나자 군부 고위 인사들이 연이어 불명예 사직한다. 또한 진범인 에스테라지는 여론이 불리해지자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망명한다. 그는 1923년까지 영국에서 가명으로 살아가면서 천수를 누렸다. 이로써 프랑스 군부가 군의 위신을 위하여 개인의 인권과 정의를 희생시키고 드레퓌스를 끝까지 진범으로 몰아간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p> <p contents-hash="3e38038f8d3e7aeb58f2b87af1a22faa442b6fee9799e45be67c8418153d85e8" dmcf-pid="KhsFn3DgFW" dmcf-ptype="general">1899년 마침내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이 열리게 된다. 드레퓌스는 악마섬에서의 5년 유배생활을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하지만 뜻밖에서도 재심에서도 법원은 드레퓌스에게 또다시 유죄를 선고했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드레퓌스파와 반드레퓌스파로 나뉘어 극단적 진영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었기에 바로 무죄가 선고된다면 반대파들의 극심한 반발과 사회혼란은 불 보듯 뻔했다.</p> <p contents-hash="dd0312ff78f0f916a8c735b38756c6dae88f12cb6ec5d0762ac7f79aa3b1561d" dmcf-pid="9lO3L0wauy" dmcf-ptype="general">이에 프랑스 정부는 정치적 타협을 모색하며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특별사면을 제안했다. 오랜 유배생활에 정신적으로 지쳐있던 드레퓌스는 결국 제안을 수락했다. 1899년 9월 19일 드레퓌스는 마침내 사면을 받아 겨우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p> <p contents-hash="9f8477e185101570497e859ef5dfa9ddcd6838160acbc8e99b4e74a097dafdeb" dmcf-pid="2SI0oprN0T" dmcf-ptype="general">하지만 드레퓌스의 가족들은 사면 이후에도 그의 명예를 되찾기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석방 7년 만인 1906년 7월 12일에야, 프랑스 최고법원에서 만장일치 판결로 드레퓌스에서 최종 무죄를 선고한다. 드레퓌스는 무려 12년 만에 겨우 '조국을 배신한 스파이'라는 오명을 완전히 떨쳐내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훗날 드레퓌스는 군에 다시 복귀했고 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하면서 자신이 '프랑스를 진정으로 사랑한 애국자'였음을 행동으로 증명해보였다.</p> <p contents-hash="ed2d68d228073182318694f23f9fb2c159d4b857934f9e7dd478b3bab4fafa27" dmcf-pid="VvCpgUmj3v" dmcf-ptype="general">한편으로 드레퓌스 사건은 이후의 세계사에도 생각지 못한 영향을 미쳤다. 드레퓌스 사건을 통하여 프랑스에서 종교와 군부의 막대한 영향력이 수면위로 드러났다. 당시 프랑스의 가톨릭교와 언론들은, 반유대정서를 선동하여 군부의 드레퓌스 유죄몰이에 적극 가담했다. 종교의 정치개입을 규제할 필요성을 느낀 프랑스 사회는 1905년 12월 9일 '정교분리법'을 제정하며 프랑스의 국교였던 가톨릭의 정치참여와 특권을 폐지했다. 이는 프랑스가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p> <p contents-hash="8147b548aee00e9f4925dfe3c137022419f0822814880a5c34b012699103a577" dmcf-pid="fThUausAFS" dmcf-ptype="general">또한 프랑스의 엘리트 군인이었던 드레퓌스조차 유대계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탄압받고 있는 모습을 지켜본 유럽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경각심이 높아졌다. 이들을 중심으로 점차 유대인들만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시오니즘' 민족주의가 성행하게 된다. 1897년 유럽의 17개 국가에서 유대인들이 모여 '제 1차 시오니스트 회의'가 개최되고 이는 훗날 이스라엘 건국의 출발점이 된다.</p> <p contents-hash="978469ca3c1c92286288826247fa745cb6ba40efde335609363a3ff6347878d7" dmcf-pid="4yluN7Oc7l" dmcf-ptype="general">한 유대인 장교의 억울한 누명에서 시작된 사건은, 프랑스가 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 탈바꿈하게 만드는 전환점이 되었고, 동시에 이스라엘의 탄생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계기로 역사에 남았다. 드레퓌스 사건이 남긴 특정 대상에 대한 무분별한 혐오와 편견, 극심한 진영대결, 인권과 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고민 등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는 숙제이기도 하다.</p> </section> </div> <p class="" data-translation="true">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p> 관련자료 이전 한혜진, 연하男 직진 매력에 심쿵…"훅 치고 들어와" ('누내여') 11-04 다음 앤팀, 한국 데뷔 앨범으로 초동 122만 장 돌파 ‘커리어 하이’ 11-04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한 회원만 댓글 등록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