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속에서 빛난 국민의 힘, 임진왜란과 IMF가 준 교훈 작성일 11-05 12 목록 <div id="layerTranslateNotice" style="display:none;"></div> <strong class="summary_view" data-translation="true">[리뷰] tvN STORY < 벌거벗은 한국사2 ></strong> <div class="article_view" data-translation-body="true" data-tiara-layer="article_body" data-tiara-action-name="본문이미지확대_클릭"> <section dmcf-sid="t3cdrsPKpB"> <p contents-hash="ac403aed2c72aac5fe32a271a9e43c867ed7403d73afe43b190d4942498d61a6" dmcf-pid="F0kJmOQ9uq" dmcf-ptype="general">[이준목 기자]</p> <p contents-hash="3abc92c3c397f4303316a389b5002b911d343c1fff0d6d7c6d3609903b582fd8" dmcf-pid="3HL6jc9U3z" dmcf-ptype="general">임진왜란(1592)과 IMF(1997) 외환위기 사태는 오랫동안 평화에 익숙해져 있던 한반도를 덮친 최악의 위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400여년의 역사를 뛰어넘어 찾아온 국가적 위기들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했고, 어떤 교훈을 남겼을까.</p> <div contents-hash="ad95048a8087ae8ed7890927713fd3485c3495f24f8faf61da2136cdfc22c0b6" dmcf-pid="0XoPAk2uz7" dmcf-ptype="general"> 11월 4일 방송된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2>에서는 '한반도 최악의 위기, 임진왜란 VS IMF' 이야기를 다뤘다.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3c933c9e41a941de1c2d443b9740d0870475ff81e9aee11c8649b54bacb94eec" dmcf-pid="pZgQcEV73u"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1/05/ohmynews/20251105134503331oxnz.jpg" data-org-width="1280" dmcf-mid="5R206QZvpK"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05/ohmynews/20251105134503331oxnz.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벌거벗은한국사2</strong> 임진왜란VS IMF</td> </tr> <tr> <td align="left">ⓒ TVNSTORY</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84fc5e40952724892ed9afb8d65ad51178e2e14979f6124374e966ec6ff0f9d8" dmcf-pid="U5axkDfzzU" dmcf-ptype="general">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을 제패하고 분열됐던 일본을 통일했다. 그는 전국시대를 통해 육성된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해외 정복에 눈길을 돌렸고, 가장 먼저 이웃나라인 조선에 조공과 복속을 요구했다. </div> <p contents-hash="0d7626efb12bdabee3766781e2492a037ef78d217dc42f30604cda2cc07f3d23" dmcf-pid="u1NMEw4qUp" dmcf-ptype="general">조선도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현지의 사정을 탐문하는 등, 나름대로 일본의 위험성을 인지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조선의 세계관에서 일본(왜)은 문물에 뒤떨어진 섬나라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건국 이후 한번도 대규모 전쟁 없이 오랫동안 평화에 익숙해져 있던 조선은, 설마 일본이 전례없는 국가적인 전면전까지 걸어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일본의 정세와 국력을 과소평가한 오판이었다.</p> <p contents-hash="471ed09373a45d0eee32665c22a6920d84c4d3ad907d7f63f770b3673e246a03" dmcf-pid="7tjRDr8Bp0" dmcf-ptype="general">또한 당시 조선은 건국 200년을 넘기며 내부적으로 여러 가지 구조적인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치는 민생을 외면하고 당쟁을 통한 권력다툼에 빠져있었다. 특권층이 된 양반들의 병역기피와 부정부패로 국방의 기본인 군사력은 극도로 약화됐다. 또한 외교는 명나라와의 사대관계에만 몰두하며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에 무지했다.</p> <p contents-hash="2bed0b0999723d67efbcfe5c514da24bb5d668eecce57000ddfcf796b3cf197d" dmcf-pid="zFAewm6bp3" dmcf-ptype="general">1592년 4월 13일, 일본의 기습공격으로 마침내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막이 올랐다. 전국시대의 풍부한 군사경험과 최신식 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은, 부산진에 상륙한 이래 불과 20일만에 파죽지세로 요충지를 함락하며 수도 한양까지 진격해온다.</p> <p contents-hash="599ca04221e9f617dd99a5f495f112a2caab094f7c786976167bca1ec685b4b9" dmcf-pid="q3cdrsPKpF" dmcf-ptype="general">오랜 평화로 전쟁 경험과 대비가 부족했던 조선은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궁지에 올린 선조는 수도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몽진했다. 일본은 한양을 점령하고 조선 각지를 유린했다. 조선 백성들은 일본군의 가혹한 학살과 약탈에 시달려야했다.</p> <p contents-hash="5f37467c90c07282fae08251192d268799dcdbb2942a509d3f173c6afa1e358e" dmcf-pid="B6WmZ1cnFt" dmcf-ptype="general">일본군이 노린 것은 조선의 영토만이 아니었다. 일본은 조선의 발전된 도자기 기술을 탐내어 문화재는 물론이고 세공 기술자와 손재주 있는 여성들을 대거 납치해갔다. 일본군의 포로가 된 조선 백성들은 국제 노예가 되어 싼 값에 해외로 팔려가기도 했다.</p> <p contents-hash="f94de24cbaf22661044e795716c67159f0cac63eced398b426de430792b995b6" dmcf-pid="bPYs5tkLp1" dmcf-ptype="general">하지만 조선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1592년 5월 7일, 조선군은 옥포해전'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임진왜란 개전 이후 첫 승을 거둔다. 바로 충무공 이순신의 데뷔전이었다. 이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한산도 대첩' '명랑대첩' 등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육지에서의 패배와는 달리, 일본 수군을 몰아내고 제해권을 장악한다.</p> <p contents-hash="dcf56a856190ec910e6879b9c472891a1ffbdd20cc24d4157daf2a2fc5529f49" dmcf-pid="KQGO1FEo05" dmcf-ptype="general">이순신이 지휘한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단 한차례도 패하지 않는 불패 신화를 작성했다. 재해권을 상실한 일본은 보급로가 차단되며 더이상 공세를 이어가기 어렵게 됐고, 조선은 반격의 실마리를 잡게 된다. 결국 히데요시는 "바다에서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싸우지 말라"는 명령까지 내릴만큼 이순신을 두려워하게 된다.</p> <p contents-hash="2f176ec7c19e7a2e5876b221d06fba10092a278b4d8a774faa4761a3f9fac055" dmcf-pid="9xHIt3DgzZ" dmcf-ptype="general">또한 육지에서는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백성들이 직접 전투에 뛰어들며 각지에서 자발적인 의병(義兵)들이 등장하여 활약한다. 의병들은 현지 지리에 밝은 이점을 활용하여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괴롭혔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의 숫자는 무려 10만이 넘었다고 한다. 그저 지배층만 굴복시키면 바로 승리하는 자국의 내전 방식에만 익숙했던 일본군으로서는, 민초들이 스스로 나서서 결사항전하는 낯선 상황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p> <p contents-hash="8ba80993929dd20dd950fa91cb5350df5bccf3124c4e9ed1317111d60599af68" dmcf-pid="2MXCF0wa3X" dmcf-ptype="general">한편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조선이 무너진다면 자국의 안보도 위험해지는 명나라로서도, 당시 황제였던 만력제의 전폭적인 지원속에 대규모 군사와 물자 원조를 단행했다. 조선과 명나라의 '조명연합군'이 구축되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면서 임진왜란의 전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p> <div contents-hash="12408d94180804e12457882611cf76e94120f3f8acac15cd3a71466ea57849d1" dmcf-pid="VRZh3prNUH" dmcf-ptype="general"> 1598년 8월 18일, 임진왜란을 주도한 전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다. 이미 전선은 정체되며 수세에 몰린 일본군은 어차피 전쟁을 지속해도 승산이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철수하고 7년에 걸친 전란은 조선의 승리로 끝난다. 비록 비싼 대가를 치렀지만, 나라를 위하여 용감하게 전쟁에 뛰어든 수많은 영웅들과 백성들이 함께 이룬 승리였다.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f0098e2535084880aedf954382dd87bce2b1a5b1581d091bac5176771e8cf5c8" dmcf-pid="fe5l0UmjzG"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1/05/ohmynews/20251105134504671jljv.jpg" data-org-width="1280" dmcf-mid="1ae2Lgztpb"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05/ohmynews/20251105134504671jljv.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벌거벗은한국사2</strong> 임진왜란VS IMF</td> </tr> <tr> <td align="left">ⓒ TVNSTORY</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5292d3a12f96f105f89a7d68b2be2293f7e046d5ab5428a694aacf8b8a26f63e" dmcf-pid="4d1SpusAUY" dmcf-ptype="general"> 그로부터 약 400여 년후, 1995년의 대한민국에 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거치며 눈부신 경제 성장으로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고 있었다. </div> <p contents-hash="f9759304ff0a38016276fa2a955f8ede3baec767cffb42406ef160b2b2cfc246" dmcf-pid="8JtvU7OcuW" dmcf-ptype="general">한국은 수출 1천억 달러를 돌파하며 1996년에는 아시아 개발도상국 최초로 '선진국들의 모임'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한다. 경제적 호황과 풍요속에서,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나 화려한 소비생활과 개성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를 뜻하는 '오렌지족 ' 'X세대' 등의 신조어가 탄생하기도 했다.</p> <p contents-hash="1b0972ba8eb7002fa2618d39e9b86216b636045766d6896e853bab3fdbe5c052" dmcf-pid="6s4uxRtWzy" dmcf-ptype="general">하지만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한국 경제는 내부적으로는 불안정한 '모래위의 성'과도 같았다. 한국의 주요 기업들은 1990년대 중반까지 이자율이 비싼 국내 은행보다 저렴한 해외은행으로부터 단기 외채를 끌어와서 문어발식 사업확장을 추구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p> <p contents-hash="1904eb7a1d49a57e743382d3066d7653f11f1507457bf020d3bf3997e9cc8478" dmcf-pid="PO87MeFY3T" dmcf-ptype="general">그런데 1997년 외국은행들이 돌연 앞다투어 투자금 회수에 나서는 현상이 발생한다. 태국을 시작으로 '동남아 금융위기'가 발생하며 불안감을 느낀 해외 투자자들이 비슷한 경제 구조를 가진 아시아 국가들의 투자금 회수에 나선 것. 그 여파는 한국에도 번지기 시작했고, 한국 기업들은 막대한 단기외채를 갚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며 많은 양의 달러가 급격하게 유출되기 시작했다.</p> <p contents-hash="431a0fd7055ba9ee80235ecc6a8ba741aedafa0b9c7809b88ea8f59bc3085fba" dmcf-pid="QI6zRd3GUv" dmcf-ptype="general">이미 위기의 전조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음에도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오랜 경제 호황에 도취되어 안일하게 대처했다. 달러 부족으로 환율은 무섭게 치솟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 700-800원대를 유지하던 환율은 1997년 1.695원으로 폭등했다. 당시 대한민국의 외환보유고는 300억 달러 정도였으나 외채는 무려 1,500억 달러(약 254조원)가 넘었다. 1997년 11월에 이르면 대한민국의 외환보유고 잔액은 20억 달러까지 급감했다. 국가가 채무를 상환하지 못하는 '국가부도 사태'라는 건국 이래 초유의 위기가 눈앞에 다가왔다.</p> <p contents-hash="2a07e17d75dbc5c48fcc6f042053ed44caef70d409965aff09d0da9546fc0029" dmcf-pid="xCPqeJ0HUS" dmcf-ptype="general">그해 11월 21일, 정부는 긴급 속보로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자금지원(구제금융)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IMF의 지원은 절대 공짜가 아니었다. 당시 IMF 총재였던 미셸 캉드쉬는 대한민국 정부와 협상하며 외화 지원의 조건으로 금리인상, 기업구조 개편,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요구했다.</p> <p contents-hash="4bede60d7c98e47417f0f9e45973efd4e9c0735fbf007f3fbb8f30ddef12fddc" dmcf-pid="yfvDGXNdUl" dmcf-ptype="general">가혹하고 강제적인 협상조건이었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IMF의 요구를 거부할 힘이 없었다. 결국 IMF의 요구대로 협상이 타결되며 대한민국은 550억달러(약 93조원)의 지원을 받는데 합의하며 일단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IMF에 사실상 나라의 경제주권을 내주고 빚쟁이 국가로 전락했다는 점에서, '한강의 기적'에 도취되어었던 대한민국에 '경제 국치의 날'이라는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p> <p contents-hash="cee8ba161159dd12ef8177cc4de3187d8757fd186b9831b1bcb47dad47ab1a73" dmcf-pid="W4TwHZjJzh" dmcf-ptype="general">진정한 위기는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기업들은 곧바로 IMF 사태의 직격탄을 맞았다. 1997년 당시 국내 30대 대기업중에서 재계 4위 대우 등 무려 13곳이 도산하거나 해체되며 한국 경제에 큰 충격을 안겼다. 금융기관인 은행마저 26개 은행중 16개사가 강제 통폐합을 피하지 못했다.</p> <p contents-hash="98f8e92ff0c18a5cfcd23852cecdda0508d23740535933a284652644cfddcdd5" dmcf-pid="Y8yrX5AizC" dmcf-ptype="general">서민들의 삶은 더욱 비참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거리에 내몰렸다. 생활고에 시달라다가 집을 잃고 노숙을 하기도 했다. 당시 10대-20대를 보낸 젊은이들은 가장 빛나야할 청춘의 시기에 불확실하고 어두운 나날을 보내며 고통을 받아야했다.</p> <p contents-hash="d16f1995ad4935aa96696764f573814535c7eeca2e10fae97c7580cb7088315c" dmcf-pid="G6WmZ1cnzI" dmcf-ptype="general">암울한 시간이었지만, 임진왜란 때도 그러했듯 대한민국 곳곳에서 위기 극복을 위하여 가장 앞장선 것은 이번에도 국민들이었다. 1998년 국가부도위기의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국민들 사이에서 '금 모으기 운동'과 '아나바다(아껴쓰기, 나눠쓰기, 바꿔쓰기, 다시쓰기)' 캠페인들이 벌어졌다.</p> <p contents-hash="6530e781a621224e01af5832f281a58a38fbc97a51d15f13fd52d88e15996669" dmcf-pid="HPYs5tkLFO" dmcf-ptype="general">화폐가치가 폭락하는 상황에서 금의 가치가 더욱 높아진 상황이었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신의 이익보다 나라를 위하여 기꺼이 소중한 금을 내놓는데 동참했다. 3개월 사이에 참여한 국민들만 350여만명에, 모인 금은 약 6천만돈(당시 기준 약 2조원), 무게는 무려 약 227톤에 이르렀다. 국민들의 정성으로 걷힌 금은 외국에서 팔려서 약 22억 달러를 확보하며 외환위기 극복에 큰 힘이 됐다. 외국에서도 이러한 한국의 금 모으기 운동에 크게 주목하며, 한국인들의 남다른 애국심과 단합력에 감탄하기도 했다.</p> <p contents-hash="7b58e53cd8bcfb3e265d9d7ac65443216238b8a7b49ff5ae4ed36eab6e16981b" dmcf-pid="XFAewm6b7s" dmcf-ptype="general">2001년 8월 23일, 외환위기가 벌어진지 불과 3년 8개월만에 IMF에 빌린 차입금 195억달러를 조기 상환했음을 공식 발표했다. 이는 IMF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이로써 한국은 IMF를 졸업하고 잃어버린 경제주권을 다시 회복했다. 정부, 기업, 국민들이 힘을 합쳐 뼈를 깎는 노력 끝에, 국가 신용등급이 적격으로 회복되고 무역수지는 다시 흑자로 돌아섰다. 외환보유고는 1천억 달러에 육박하며 금융시장은 안정을 되찾았다. 대한민국 국민들 모두의 힘이 모여서 만들어낸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p> <p contents-hash="cbaffd5eb3f443f90a47761253f5a455674cd6c30d3ca50ee79c205829c2d2d4" dmcf-pid="Z3cdrsPKUm" dmcf-ptype="general">역사는 때로 우리에게 뼈아픈 고통을 주지만, 그 속에서 값진 교훈을 얻기도 한다. 위기의 전조를 외면한 대가로 한반도는 큰 재앙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항상 희망의 불씨는 피어났고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40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나라를 위기로 몰고 간 두번의 큰 국난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위기 극복의 중요성과 국민의 위대함을 되새겨보게 만든 시간이기도 했다.</p> </section> </div> <p class="" data-translation="true">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p> 관련자료 이전 청강문화산업대, ‘CROSS OVER : 앨리스의 정원’ 개최 11-05 다음 지석진의 굴욕? ‘피부 나이’는 환갑 11-05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한 회원만 댓글 등록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