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스파르타' 고구려, 배신자가 열어준 멸망의 문 작성일 11-18 15 목록 <div id="layerTranslateNotice" style="display:none;"></div> <strong class="summary_view" data-translation="true">[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strong> <div class="article_view" data-translation-body="true" data-tiara-layer="article_body" data-tiara-action-name="본문이미지확대_클릭"> <section dmcf-sid="qVZF3QKp7d"> <p contents-hash="ac403aed2c72aac5fe32a271a9e43c867ed7403d73afe43b190d4942498d61a6" dmcf-pid="Bf530x9UUe" dmcf-ptype="general">[이준목 기자]</p>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047dbb20c6ecabd0fccfc2823bee6ee90f541ea949766fe871ec40451109e10e" dmcf-pid="b410pM2uFR"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1/18/ohmynews/20251118102702711lxmn.jpg" data-org-width="1280" dmcf-mid="uOwOI0GhUn"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18/ohmynews/20251118102702711lxmn.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벌거벗은세계사</strong> 고당전쟁</td> </tr> <tr> <td align="left">ⓒ TVN</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f69766b8c16ad129b6903bae5bfb9c90debef1607310ca363213e7602b2ba300" dmcf-pid="K8tpURV7FM" dmcf-ptype="general"> '고구려-당나라 전쟁'은 서기 7세기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싼 거대한 국제전쟁이었다. 당시 세계 최강대국으로 승승장구하던 당나라의 앞을 가로막은 국가가 고구려였다. 당나라는 왜 그토록 고구려 정벌에 집착했으며, 고구려는 어떻게 강성한 중국 통일제국들의 연이은 침공에도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었을까. </div> <p contents-hash="fd404b28882bdbd48a191dde0f21e7a39e2b57d08d401989b942bf630fa16a3b" dmcf-pid="96FUuefz7x" dmcf-ptype="general">11월 17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동아시아 패권전쟁, 당나라 VS 고구려'편이 그려졌다.</p> <p contents-hash="aaf297957b14e7140a95d50274788be3f43981ab31f9a95938e98fdf100dceb1" dmcf-pid="2xpzqi6b7Q" dmcf-ptype="general">서기 618년, 이연(고조)이 건국한 당나라가 중국의 새로운 통일왕조로 들어선다. 626년 이연의 아들 이세민은 쿠데타인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친형제들을 살해하고 아버지를 강제로 폐위시켜 권력을 장악하면서 2대 태종으로 등극한다.</p> <p contents-hash="e36eaaa75c9f23e735ba196e153f7ca52b229f222b3b9bb78a4ae07e6c63134c" dmcf-pid="VMUqBnPK0P" dmcf-ptype="general">피로 권력을 쟁취한 당 태종은 황제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업적을 세우는 게 중요해졌다. 당 태종은 황권 강화를 위하여 각지에서 활발한 대외 정복전쟁을 추진했고, 본인의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바탕으로 많은 성과를 거두는 데 성공했다.</p> <p contents-hash="c000cd0ba308eebd40172b5f86d1dfd08c94556f45bec95d73693b09d19d5486" dmcf-pid="fRuBbLQ976" dmcf-ptype="general">특히 당 태종의 숙원은 고구려 정벌이었다. 당나라의 선대 통일 왕조였던 수나라는 4차례에 걸친 침공에도 불구하고 '살수대첩' 등 고구려에게 번번이 패퇴하면서 국력이 급격히 소모되어 멸망으로까지 이어지는 빌미가 됐다. 중국의 왕조들에게 '아시아의 스파르타'였던 고구려 정벌은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반드시 넘어야 할 숙원사업이었다.</p> <p contents-hash="b77bae9f486901b5adfc4f30481faa081fc7193aca9f63adc29b94376982ef4f" dmcf-pid="4e7bKox2z8" dmcf-ptype="general">고구려 역시 이러한 당나라의 야욕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고구려는 631년부터 당나라의 침략을 대비하여 요동 지방에 천리장성을 축조하며 방어태세를 다졌다.</p> <p contents-hash="9282371079d487db9e2e1f0f2b4e79983efe04e5aa5007ac23366c58644c1e2c" dmcf-pid="8dzK9gMV04" dmcf-ptype="general">642년, 고구려에서 뜻밖의 격변이 벌어진다. 고구려의 귀족이었던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27대 국왕이었던 영류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인 보장왕을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하고 스스로 행정권과 군사권을 아우르는 최고위직인 태막리지에 올랐다.</p> <p contents-hash="3729fa420f99b714ca9c1338c37d2eba2cac2c7573a342ef401bc4a9550fcd48" dmcf-pid="6Jq92aRf3f" dmcf-ptype="general">연개소문의 집권은 고구려 정벌의 기회를 노리던 당 태종에게는 명분을 제공하는 계기가 됐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와 외교적으로 점점 밀착하고 있던 신라를 압박하며 견제했다. 위기에 몰린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당태종은 연개소문의 쿠데타와, 신라 침공 중단거부를 명분으로 결국 고구려 정벌을 선언한다.</p> <p contents-hash="39d3c795b2130fff0dad5ad65c3eb1d7349567e7aa31441d06fa3770e1347bd2" dmcf-pid="PiB2VNe4FV" dmcf-ptype="general">645년, 1차 고구려-당나라 전쟁의 막이 올랐다. 당시 고구려 정벌에 투입된 군대는 정확한 수치는 남아있지 않지만 약 20~30여만 정도로 추정되었으며 당 태종 본인도 총사령관으로 직접 참전했다. 전황 초반은 고구려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고구려는 요동 방어선의 중심인 요동성, 백암성, 개모성 등이 연이어 함락당하며 위기에 몰렸다.</p> <p contents-hash="fe918b94975a101778cf14610fd6dd3379549cfa1f1b3fa188e4af5871448abb" dmcf-pid="QnbVfjd832" dmcf-ptype="general">당 태종의 다음 목표는 안시성이었다. 당군에게 안시성은 평양으로 가기 위한 주요 교통로였기에 반드시 확보해야 할 거점이었다.</p> <p contents-hash="154c214fd7b04c37ff53d6fbbe8e33659bb4daccad2a7f85481993067ba9cec9" dmcf-pid="xLKf4AJ6U9" dmcf-ptype="general">645년 6월, 당군의 안시성 포위 공격이 시작된다. 하지만 예상외로 안시성은 작은 규모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안시성은 험준한 산세에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고, 흙과 돌을 다져 만든 튼튼한 성벽은 외부 충격을 흡수할 수 있어서 당나라가 자랑하던 공성무기인 포차의 위력도 견뎌냈다.</p> <p contents-hash="816db2f3e9dc23326f539b6abf7f388dc1031ab1d750706e513f790f4577f654" dmcf-pid="yNfPQDoMUK" dmcf-ptype="general">당 태종은 성벽보다 높은 토산을 건설하여 안시성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공격한다는 전략을 구상했다. 당군은 무려 하루에 8000여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약 두 달 만에 토산을 쌓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긴급하게 건설된 토산은 약한 흙구조에 비바람까지 겹치면서 완공 직후 얼마되지 않아 무너지고 만다. 이 틈을 노린 고구려군의 기습으로 당군은 그나마 남아있던 토산마저 빼앗기고 말았다.</p> <div contents-hash="ba34adc870c1b89f42940d8d99299db36ad44e1d361f59a320159c06bd01d3bb" dmcf-pid="Wj4QxwgRpb" dmcf-ptype="general"> 설상가상 혹독한 겨울 추위까지 닥쳐오면서 당군은 싸울 의지를 잃고 상황은 점점 악화된다. 결국 당 태종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철군을 결정하면서 1차 고당전쟁은 고구려의 완벽한 승리로 끝난다. 쓰디쓴 패배를 맛본 당 태종은 퇴각하면서도 고구려군의 추격에 쫓기며 병사들과 함께 궃은 일을 하고 종기에 시달리는 등, 갖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정작 중국의 사서인 <구당서> <신당서> 등에는 굴욕적인 패전을 감추기 위하여 마치 승리를 거둔 것처럼 기록을 조작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d9498d372097cf632e14acd2fba0e9427fe319d875ddce42555c97d3250839a6" dmcf-pid="YA8xMrae7B"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1/18/ohmynews/20251118102704084szta.jpg" data-org-width="1280" dmcf-mid="zDUqBnPKpJ"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18/ohmynews/20251118102704084szta.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벌거벗은세계사</strong> 안시성전투</td> </tr> <tr> <td align="left">ⓒ TVN</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d7910c30aba2177ca3af16ac43811e03d2e4d152560ba8af80ac4229d106d8c4" dmcf-pid="Gc6MRmNd7q" dmcf-ptype="general"> 당나라는 1차 전쟁에서 고구려에 쓴 맛을 보고 난 뒤, 648년 신라와 '나당연합'을 결성하며 새로운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양국은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 땅을 모두 신라가 차지하는 조건으로 거래를 약속했다. </div> <p contents-hash="f55ea9ff6aba136f6d8061eabe0c1d480febedb677b34788fbd401c2ae077e19" dmcf-pid="HkPResjJ0z" dmcf-ptype="general">649년 고구려 정벌을 주도했던 당 태종이 사망한다. 당 태종은 의외로 '다시는 고구려를 정벌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당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은 아버지의 유언과 달리, 나당연합을 유지하며 고구려 정벌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p> <p contents-hash="b6ca3182129c0dd0bdb6aa7b547eeeb69cc4ce491e22e64e4aa6500644863900" dmcf-pid="XEQedOAip7" dmcf-ptype="general">660년 나당연합군은 먼저 백제 정벌에 나선다. 당나라 입장에서 백제 정벌은 궁극적인 목표인 고구려 정벌을 위한 사전작업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당군은 육로 대신 수군을 이용하는 장거리 바닷길 원정을 통하여 백제를 기습했다.</p> <p contents-hash="8b987fa2bcbe2e4e5a97bed175e5c86eb995bf8a2ccd7a1be103df648d2fb1c9" dmcf-pid="ZDxdJIcn3u" dmcf-ptype="general">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은 철저한 보안 속에 전광석화같은 속도전으로 진행됐다. 백제는 당군이 코앞에 상륙할 때까지 침공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나당연합군의 기습과 진격이 너무나 신속했기에 첫 교전부터 백제가 멸망하기까지는 불과 약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고구려가 돕고 싶었더라도 도울 시간이 없었다. 이로서 고구려는 남쪽의 신라를 견제해줄 강력한 동맹국을 잃고 양면에서 포위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p> <p contents-hash="c75bab65cf3887714e2d0b55eb028df4df666b71bd2cc3544c123ff5fcbd55ce" dmcf-pid="5wMJiCkLuU" dmcf-ptype="general">이듬해인 661년, 당나라는 기세를 몰아 20여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16년 만에 두 번째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백제 정벌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은 당군은 고구려의 견고한 육상방어선을 우회하여 해로를 통하여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노리는 전략을 들고나왔다.</p> <p contents-hash="8ef96a4c431db9f00e3c61973ee1bea2635591e54e73c3106760c670e502a9b8" dmcf-pid="1CnaNysA3p" dmcf-ptype="general">고구려군의 총사령관인 연개소문은 평양성이 포위당하자 농성하면서 장기전으로 끌고갔다. 여름부터 겨울까지 6개월 넘게 진행된 전투로 인하여 당군은 점차 추위와 피로에 시달리며 지친 기색을 드러냈다. 여기에 연개소문이 성문을 열고 기습공격을 감행하면서 당군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신라 역시 백제부흥운동 진압 등으로 고구려 정벌에 적극 참여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662년 4월, 당군이 평양성 포위를 풀고 철군하면서 2차 고당전쟁 역시 고구려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p> <p contents-hash="30eb52637c4221a111d4f8fa1652714c76a3c4fbe021fd89df958102ee69d737" dmcf-pid="thLNjWOc30" dmcf-ptype="general">거듭된 패전으로 큰 손실을 입은 당나라는 정말로 고구려 정벌을 완전히 포기할 것을 고민했다. 그런데 동아시아 판도를 뒤흔드는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고구려의 철혈 독재자였던 연개소문이 2차 고당전쟁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것.</p> <p contents-hash="0b61619d325bb4def1eb690adfb400fc17718dbf59a3f8bf22c0c49f26cc4de9" dmcf-pid="FlojAYIk03" dmcf-ptype="general">연개소문 사후 고구려의 권력은 그의 장남이었던 연남생이 물려받아 대막리지에 올랐다. 하지만 집권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동생인 연남건, 연남산과 권력투쟁이 벌어졌고, 연남생은 동생들의 반란으로 모든 권력을 잃고 목숨까지 위협받게 된다. 궁지에 몰린 연남생의 선택은 바로 적국인 당나라로의 투항이었다.</p> <p contents-hash="01eb6b23db8c62a87cc64937eaf8e66f884caf3fcea9d0ba2e293597ab33db2a" dmcf-pid="3SgAcGCEFF" dmcf-ptype="general">당나라는 고구려 정벌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 고종은 다시 한번 대군을 파병하여 고구려를 침공했다. 조국을 배신한 연남생은 당군에 호응하여 자신의 세력권인 국내성을 포함한 6개의 성과 고구려의 주요한 군사 기밀 정보들을 모두 당나라에 바쳤다. 여기에 신라 역시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여 고구려는 사면초가에 몰리게 된다.</p> <p contents-hash="f3de81d30ab191f8a479d8306905ae10353f49e63822aefe9232c6564132d881" dmcf-pid="0vackHhDzt" dmcf-ptype="general">668년 8월,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이 결국 나당연합군에게 함락되면서 700여 년에 걸쳐 이어온 고구려의 역사는 종말을 맞이한다. 동북아시아의 군사강국으로 자주적인 세력을 구축해온 고구려의 영광은 권력투쟁을 벌이던 형제들의 내부분열과 배신으로 허망하게 무너졌다. 연남생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도 말년까지 당나라에서 후한 대우를 누렸다고 한다.</p> <p contents-hash="40ccf7c227273bc960a8a077f482c9af5d900ce066c8df82e02d33c99996ab4d" dmcf-pid="pTNkEXlw71" dmcf-ptype="general">한편 백제에 이어 고구려까지 멸망한 후에도 당나라의 야욕은 멈추지 않았다. 당 고종은 내친김에 동맹국인 신라마저 정벌하고 한반도를 장악하려고 했다. 당나라의 야욕을 간파한 신라도 은밀히 고구려 부흥세력과 연대하며 당나라를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준비했다.</p> <p contents-hash="c50cc7fdc6269e766992887744d4fb7947cb83a2d6e3586b812872cce3814aa1" dmcf-pid="UyjEDZSr35" dmcf-ptype="general">670년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의 연합으로 당나라를 선제 공격하면서 '나당전쟁'의 막이 올랐다. 전쟁은 약 7년간 계속되었고, 신라는 675년 매소성 전투, 676년 기벌포 전투 등에서 연이어 당군을 격퇴하며 승기를 잡았다. 결국 당군은 한반도 점령을 포기하고 완전히 철수한다. 신라는 비로소 한반도에서 대동강 이남의 지배권을 확보하며 진정한 '삼국통일'을 달성하게 된다. 이어 698년에는 발해가 건국되며 당나라를 몰아내고 옛 고구려의 영토 대부분을 회복했다.</p> <p contents-hash="c024cb45d3ad1f692f3a4d1eedf71430f80a832784556854b3784374229e44e3" dmcf-pid="uWADw5vmFZ" dmcf-ptype="general">고구려는 사라졌지만 그 유산은 이후의 한반도 역사에서도 꾸준히 이어졌다. 918년 후삼국 시대를 평정하고 신라에 이어 새로운 통일국가가 된 고려는, 국호에서부터 고구려의 정통성 계승을 표방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영문명인 'KOREA' 역시 고려 시대 때 아라비아 상인이 고려를 부르는 호칭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오늘날 세계를 휩쓸고 있는 'K-열풍'의 뿌리는 어쩌면 고구려에서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p> </section> </div> <p class="" data-translation="true">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p> 관련자료 이전 백종원, '흑백요리사2' 공개된다고 집 나간 신뢰가 돌아오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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