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근대화를 외치던 국가의 배신 작성일 11-20 6 목록 <div id="layerTranslateNotice" style="display:none;"></div> <strong class="summary_view" data-translation="true">[리뷰] 다큐멘터리 <1980 사북>이 일깨워준 우리의 무관심</strong> <div class="article_view" data-translation-body="true" data-tiara-layer="article_body" data-tiara-action-name="본문이미지확대_클릭"> <section dmcf-sid="thntFrQ9zg"> <p contents-hash="67691bd1b65f68843ac931ea17d63437e1bcfbfb3d28e8b5b4f08181dcd90f33" dmcf-pid="FPFNj2YC0o" dmcf-ptype="general">[박성호 기자]</p> <p contents-hash="1a616a42948b144eacd3146e2cd718f795c12079083eb88b51ed3e203eedfbc3" dmcf-pid="3Q3jAVGhUL" dmcf-ptype="general">1970년대와 1980년대 대한민국 산업화의 한가운데서 석탄 채굴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국내 최대 석탄 기업으로 우뚝 섰던 동원탄좌는, 시대의 변화와 석탄 합리화 정책에 따라 점차 규모가 축소되다가 2000년대 초반 결국 폐광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오너 일가는 이미 1968년 '삼성연탄'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1981년 '전원산업'으로 개칭한 기업을 사업 전환의 핵심 축으로 삼았다. 폐광 후 장남이 이끌던 동원그룹은 바다모래채취 사업 등을 하였으나 결국 2016년 매각되었다. 하지만 차남이 물려 받게 되는 그룹의 알짜배기 전원산업은 1986년부터 제주 남서울호텔 인수 등 호텔업에 본격 진출했고, 1997년 리츠칼튼 서울 호텔(현 르메르디앙 서울)을 개관하며 레이크우드 컨트리클럽(CC) 등 레저 및 부동산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해 거대 기업 집단으로 성장했다.</p> <div contents-hash="0b6bc2f791043d7a95b7fa9c13a9cee87b48ee3b0fac97fb7caa514307981300" dmcf-pid="0x0AcfHl0n" dmcf-ptype="general"> 동원탄좌는 폐광 당시 주력 광업소 부지(사북광업소)를 강원랜드 개발에 대부분 매각했고, 전원산업은 폐광 이전부터 호텔·리조트 사업을 펼쳐 막강한 자본으로 변모했다. 이로써 동원산업 오너 일가는 석탄 사업의 쇠락을 관광·레저 산업의 성공으로 완벽하게 전환시켰다. 2017년 마약, 성범죄 등 각종 범죄로 논란이 된 버닝썬이 전원산업이 소유한 르메르디앙 호텔 지하층 있던 클럽이었다. 당시 버닝썬의 지분 42%를 전원산업이 소유하고 있었고, 매일 매출 보고를 받았다는 의혹 등이 제기된 적도 있었다.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bfa9fd7ffc0aceb1827eb95edc85db68623cd04705ceff5375d902e8757c56d2" dmcf-pid="pMpck4XS7i"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1/20/ohmynews/20251120114203102ddjk.jpg" data-org-width="353" dmcf-mid="GOQ1twPKzk"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20/ohmynews/20251120114203102ddjk.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1980 사북> 공식 포스터</strong> 1980년 사북민주항쟁을 다룬 다큐멘터리의 공식 포수터</td> </tr> <tr> <td align="left">ⓒ 영하사 느티</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87dacd2f90620c0ec4c11a0b1e956972d1d6e0d3874b292db3dd0c6338102bf0" dmcf-pid="URUkE8ZvUJ" dmcf-ptype="general"> 다큐멘터리 〈 1980 사북 〉(감독 박봉남, 128분)이 조명하는 사건은 바로 이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서 벌어진 항쟁이다. 이 항쟁은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에서 오랫동안 묻혀 있었지만, 5.18 민주화운동보다 한 달 앞선 시점에 일어났다. 열악한 노동 환경 개선, 임금 인상, 어용 노조 지부장 퇴진(노조 민주화)을 요구하던 평범한 광부들의 시위로 시작된 이 사건은, 시위 현장을 사찰하던 경찰 지프차가 급히 도주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을 치면서 격화되었고, 결국 대한민국 근대사에 또 하나의 비극적인 노동 항쟁으로 기록되었다.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90df0a3d17be6648987ba8efeb089a9bd9b8ed6eaeb142f5a125fb1cddc1c18c" dmcf-pid="ueuED65T7d"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1/20/ohmynews/20251120114204414kiza.jpg" data-org-width="1280" dmcf-mid="HKMF3mx2pc"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20/ohmynews/20251120114204414kiza.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동원탄좌 노조의</strong> 조합장 선거 직전 선거권을 가진 대의원들을 단체로 여행을 보내는 등의 방법으로 경쟁 후보의 선거활동을 원천 차단하는 등의 반민주적인 행위가 지속되자 노조원들 중 다수는 지속적으로 조합장 직선제를 요구하였으며, 결국 어용노조퇴진주장을 하며 시위가 발생했다고 한다.</td> </tr> <tr> <td align="left">ⓒ 영화사느티</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b8acf997b5a650c33b165543e59796e311611ba39a982e204049f7cdd8114156" dmcf-pid="7d7DwP1yue" dmcf-ptype="general"> 사태 수습 후 신군부의 계엄사가 통제하던 합동수사단은 항쟁 참여자들을 연행해 가혹한 고문을 자행하고 이들을 간첩이나 불순분자로 몰아갔다. 이는 정당한 노동 쟁의를 이념적으로 오염시켜 사회 불안을 극대화하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 탄압 때와 마찬가지로 노동쟁의로 시작된 사건을 '북한이 배후에서 사회 혼란을 조장한 것'으로 왜곡해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였다. 결국 신군부의 핵심이었던 전두환은 이러한 혼란과 폭력적 진압을 발판 삼아 1980년 9월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다큐멘터리 〈 1980 사북 〉은 바로 이 잊혀진 항쟁이 남긴, 40년이 지나도록 아물지 않은 상흔을 기록한 작품이다. </div> <p contents-hash="7722ee37a955205aea972eac0fe070ee47992c0c2fef2f87d60f24dc766d2faf" dmcf-pid="zJzwrQtW3R" dmcf-ptype="general"><strong>선구자적 기록 〈먼지 사북을 묻다〉 : 침묵의 장벽을 허물다</strong></p> <div contents-hash="c653b3d0cd36e0da942a15c95c69c183d526070dae8bac5ffde36429f30aa6c4" dmcf-pid="qLbsOR0HFM" dmcf-ptype="general"> 사북 사건이 긴 세월 동안 '민주화운동'이 아닌 '폭동'이나 '소요 사태'로 불리며 침묵 속에 묻혀 있던 시절, 이미영 감독의 선구적인 다큐멘터리 〈먼지 사북을 묻다〉(감독 이미영, 80분)가 그 침묵을 깨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2년 공개된 이 작품은 20여 년간 지속된 사회적 무관심과 침묵 속에서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려 시도했다. 당시만 해도 사북 사건에 대한 공개적인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던 분위기였기에, 감독이 전국을 돌며 관련자들의 인터뷰를 성사시키는 과정은 단순한 취재를 넘어선 역사적 고증이자 투쟁의 기록이었다.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802c4397e84244762c4071dfa92f5a3492d191fdb4279dab14bd279bf7870d25" dmcf-pid="BoKOIepX7x"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1/20/ohmynews/20251120114205729bpld.jpg" data-org-width="748" dmcf-mid="XNE48ZkLpA"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20/ohmynews/20251120114205729bpld.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다큐멘터리 <먼지, 사북을 묻다> 공식 포스터</strong> 2002년 이미영 감독의 <먼지, 사북을 묻다>가 사북 민주항쟁의 진실에 최초로 접근하려 한 다큐멘터리였다</td> </tr> <tr> <td align="left">ⓒ 이미영</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4c49bd20aa84443988ada011c7873e2fe86d127374be411fdb4423c975f22179" dmcf-pid="bg9ICdUZ7Q" dmcf-ptype="general"> 처음 어렵게 입을 연 이들은 피해자들이었고, 그들의 용기에 힘입어 감독은 항쟁 발발 원인이 된 어용 노조 지부장 가족 인터뷰는 물론, 항쟁 과정에서 불편한 입장에 있었던 노조원 인터뷰까지 시도했다. 심지어 당시 사태 수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성배 강원도지사와 강원도경찰청장에게까지 접근해 사건의 전후 맥락을 입체적으로 구성했다. 비록 고문 과정에서 악명 높았던 경찰관은 인터뷰를 거부했지만, 가해와 피해의 경계에 있던 모든 목소리를 수집해 진실을 규명하려 했던 이 노력은 2001년 고문 피해자들의 명예회복 촉구 기자회견으로 이어지는 등 직접적인 사회적 행동을 끌어냈다. 다큐멘터리는 역사의 침묵을 깨고자 노력하였고, 변화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2005년 사북 사태가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인정받기까지 진실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중요한 동력이 된 기념비적인 작업이었다. </div> <p contents-hash="e24848871a5f39a4b0a5a838299f78580144cc2f6f84716dd70f6e49cf7d1690" dmcf-pid="Ka2ChJu57P" dmcf-ptype="general"><strong>〈 1980 사북 〉의 초점, 국가의 배신과 끝나지 않은 고통</strong></p> <div contents-hash="ff10a3a6ff25aa125e2063b86290a312d044d4192eef4c07b74f4139a5fc70f7" dmcf-pid="9NVhli71p6" dmcf-ptype="general"> 새로운 기록인 박봉남 감독의 〈 1980 사북 〉은 전작의 성과 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당시 정선경찰서에서 자행된 고문과 가혹행위에 대한 다양한 증언을 담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고문 후유증과 피해자들 및 그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험난한 삶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26f693a62db65cef90ae71ba48036ac92733368503ae0aa9b74e97655dda193f" dmcf-pid="2jflSnztU8"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1/20/ohmynews/20251120114207197qmeo.jpg" data-org-width="1280" dmcf-mid="Z0DbKygRzj"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20/ohmynews/20251120114207197qmeo.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1980 사북>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중인 박봉남 감독과 한경수 프로듀서</strong> PD연합최 주최 상영화에서 관객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는 박봉남 감독과 한경수 프로듀서</td> </tr> <tr> <td align="left">ⓒ 박성호</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a225e7f4935a4ed8615a2d3087076bcc23c9f5df1d8586154fada3ed39fd829d" dmcf-pid="VA4SvLqFz4" dmcf-ptype="general"> 이 영화가 항쟁의 발발 원인이나 집단 시위 과정 자체를 짧게 다룬 의도는 GV(관객과의 대화)에서 박봉남 감독이 직접 밝혔다. 박 감독은 "자본주의 기업이 어떤 욕심을 부리는지, 동원탄좌가 이후 어떻게 변모했는지는 검색하면 다 나오는,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나는 다른 것을 다루고 싶었다"고 말했다. 즉, 이 다큐멘터리의 핵심은 경제적 배경이나 항쟁의 전개 과정이 아니라, 국가 폭력이 남긴 개인의 고통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본질적인 상처'를 기록하는 데 있다.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942f51df7cdeeb0d8bcd7fb1067e123fc2e63aa078697ed474e4abbc56f4c491" dmcf-pid="fc8vToB33f"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1/20/ohmynews/20251120114208557xcwq.jpg" data-org-width="1280" dmcf-mid="5AFNj2YCFN"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20/ohmynews/20251120114208557xcwq.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2022년 재심청구에서 무죄판결 받은 강윤호씨</strong> 사북민주항쟁당시 무기고를 지키다 무기고를 탈취한 범인으로 몰려 실형을 선고받았던 강윤호씨는 이번 다큐멘터리 출연 당시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으나 다행히 재심청구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td> </tr> <tr> <td align="left">ⓒ 영화사 느티</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86d19b9c168e2eb4ccf50ef4d5fbe272ee469c6a34f7fc2b99fb08b935ba129a" dmcf-pid="4k6Tygb0pV" dmcf-ptype="general"> 영화가 집중하는 비극은 바로 국가의 '면책 약속 파기'와 '배신'이다. 당시 정부는 농성 해제를 조건으로 면책을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무참히 파기되었고 관련자들은 체포되어 물고문과 구타 등 끔찍한 가혹행위에 시달렸다. 당시 특전사가 출동해 인근에서 대기했다는 사실은 사북이 광주와 같은 비극적인 유혈사태로 번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상황을 막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무기고를 지켜 총격전을 막으려 했던 강윤호씨가 오히려 무기고 파손 주범으로 몰려 42년 만에야 누명을 벗은 사례처럼, 사법 정의는 완전히 왜곡되어 있었다.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d916c8a93b553233328678a252179f5f1865ad65a909420c83947fef42f92c3f" dmcf-pid="8EPyWaKpF2"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1/20/ohmynews/20251120114209895knga.jpg" data-org-width="640" dmcf-mid="196Tygb03a"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20/ohmynews/20251120114209895knga.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사북 민주화 항쟁 당시 시위대 해산 및 주모자 체포에 나선 경찰 병력들</strong> 시위해산을 위하여 출동한 경찰병력이 동원탄좌 진입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td> </tr> <tr> <td align="left">ⓒ 영화사 느티</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2bed2ff69e5a0002c6a17cc51663b06475538b187e59f30be6833a305cc6beb5" dmcf-pid="6XEBbToMu9" dmcf-ptype="general"> 이러한 국가 폭력은 노무현 정부(2005년 민주화운동 공식 인정), 박근혜 정부(2015년 최초 무죄 판결), 윤석열 정부(2023년 무죄 판결) 시기를 거치며 재심을 통해 사법적으로 일부 치유되었다. 그러나 정작 고문 후유증을 앓는 피해자들을 위한 지속적인 심리 치료 및 의료 지원 시스템은 모든 정권을 거치며 미흡한 채로 남았다. 수십 년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신체적 고통을 홀로 감내해야 했던 피해자들의 삶은 이미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뒤틀려버렸다. 공식 인정 이후에도 이 사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미미했고, 피해자들은 여전히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div> <p contents-hash="1539cf981b0ea9133d8b83e29c5788361cc25e29a1f940220d9de80667a7ee0d" dmcf-pid="PZDbKygRFK" dmcf-ptype="general"><strong>우리의 무관심, 끝나지 않은 고통</strong></p> <p contents-hash="f728489d2a58253ff63082e3ab93a0960dec9a0b8c5bd90a9dfc7e889a3c13f5" dmcf-pid="Q5wK9WaeFb" dmcf-ptype="general">〈 1980 사북 〉은 결국 우리 사회 전체에 대한 뼈아픈 질문을 남긴다. 5.18 등 다른 사건들이 사회적 관심과 치유의 대상이 된 것에 비해, 사북 항쟁의 피해자들은 여전히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과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들의 고통은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 우리가 짊어져야 할 역사적 부채다.</p> <p contents-hash="675712ba73ab6183f08980ee7a2e5e02f8e5814ec038320e16a9d67ffcbfd164" dmcf-pid="x1r92YNd7B" dmcf-ptype="general">〈먼지 사북을 묻다〉가 닫힌 문을 열고 진실을 끄집어냈다면, 이번 〈 1980 사북 〉은 현재 시점에서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피해자들의 상황을 고발하며,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진정한 치유와 명예를 돌려줄 책임이 남아있음을 냉엄하게 상기시킨다. 이 다큐멘터리는 역사를 '이슈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이슈 뒤에 가려진 개인들의 고통을 끝까지 추적하는 성실한 태도를 보여주며,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기록으로 남는다.</p> <p contents-hash="fa0b5b2aec4ec3314fd2ccacac79a9ea1ce503b1efaa9f74a496de0154fc2d06" dmcf-pid="yLbsOR0HUq" dmcf-ptype="general"><strong>덧붙이는 글 | </strong>이 기사는 네이버 블로그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에도 실립니다. 필자는 현재 동국대 학부 강의로 방송제작을 강의하고 있으며, 해당 강의에서 모든 스토리의 기본을 형성하는 네러티브의 구성요건과 개연성 있는 네러티브의 조건에 대한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p> </section> </div> <p class="" data-translation="true">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p> 관련자료 이전 [강일홍의 이슈토크]김호중 수형생활 18개월째 "안정된 심리상태" 11-20 다음 김재중 아이들 베일 벗었다…인코드 연습생 첫 공개 11-20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한 회원만 댓글 등록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