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도 함부로 못 하네... 자영업자의 힘, 어디서 나왔냐면요 작성일 11-23 9 목록 <div id="layerTranslateNotice" style="display:none;"></div> <strong class="summary_view" data-translation="true">[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이강에는 달이 흐른다></strong> <div class="article_view" data-translation-body="true" data-tiara-layer="article_body" data-tiara-action-name="본문이미지확대_클릭"> <section dmcf-sid="7Mi5aD6b7C"> <p contents-hash="74f94b8cfac7df6a8f32a67cc648807a0b2e37d693ebff73e73d5f11d20d6d2a" dmcf-pid="zRn1NwPKUI" dmcf-ptype="general">[김종성 기자]</p> <p contents-hash="0541f36345aec551ac8966b2df251142360d1fcc344172a63fd98c3d0e97b8a4" dmcf-pid="qeLtjrQ97O" dmcf-ptype="general">오늘날의 자영업자와 비슷한 사람들은 어느 시대나 있었지만, 이들의 존재가 하나의 경제현상이 된 것은 조선 후기다. 퓨전 사극 <이강에는 달이 흐른다>에 등장하는 보부상(부보상)들이 대거 출현한 것은 이 시기다.</p> <p contents-hash="5a2eaef7510daabe36e5a9b78ba2dfe12ea7c44b37c3528bdaa2f39e64f6f164" dmcf-pid="BdoFAmx2Fs" dmcf-ptype="general">이 드라마 속의 박달이(김세정 분)는 원래 세자 이강(강태오 분)의 배우자였지만, 조정 권력투쟁에 휘말려 궁에서 밀려난 뒤 기억을 잃은 채 보부상으로 살아간다. 그는 물건 유통뿐 아니라 용역 대행도 처리한다.</p> <p contents-hash="da3ef584f638c67e3341175215ad9a2f36e8b6f49f81aa4dcc7f41a8bf8a0279" dmcf-pid="bJg3csMVUm" dmcf-ptype="general">그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우리 딸이 열녀의 길을 요구하는 시부모 때문에 자결을 강요당할 상황에 처했으니 딸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과거의 기억을 잃고 사는 그가 이 때문에 한양에 들어갔다가 남편과 조우한 뒤에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이 처음 4회 동안 집중적으로 방영됐다.</p> <div contents-hash="962e6b6279bb90307e544e11e151c27b0dcbd5740eb05ad9867cd037ff45123f" dmcf-pid="KTHJt7hDpr" dmcf-ptype="general"> <strong>소상인 업계의 지도자, 백달원</strong>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b898eceb14655b2a35781422645c3dc130b05e12346247443c10a264ad1be920" dmcf-pid="9yXiFzlw0w"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1/23/ohmynews/20251123140002704qpdz.jpg" data-org-width="984" dmcf-mid="uuVCPJu5ph"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23/ohmynews/20251123140002704qpdz.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strong> MBC 금토드라마 <이강에는 달이 흐른다> 중 한 장면</td> </tr> <tr> <td align="left">ⓒ MBC</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975f842d268d927390a58e42937ba0f2324aa94f8292fe60ecadd86f07ae54dc" dmcf-pid="2WZn3qSruD" dmcf-ptype="general"> 지금은 보부상이라는 말이 익숙하지만, 실은 부상(負商)이 보상보다 먼저 출현했다. 지게를 이용해 물건을 지고 다니는 등짐장수들이 선배 그룹이었다. 보자기에 물건을 싸서 갖고 다니는 보상들은 그 뒤에 나왔다. </div> <p contents-hash="b6f89fd6eed105b83015808ce697497180a7cacab1422f7e3e49bfe4ec9c85ae" dmcf-pid="VY5L0Bvm0E" dmcf-ptype="general">이들 보부상의 신화적 존재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백달원이다. 백토산 혹은 백초산으로도 불린 그는 800명 정도의 상인들을 통솔하는 소상인 업계의 지도자였다.</p> <p contents-hash="fc052d6481e1a15e6578db00ed45d70346c8a626230eed65084f4930ac6af763" dmcf-pid="fG1opbTspk" dmcf-ptype="general">왕조국가들은 '상업이 번성하면 농업이 약해져 조세 수입의 기반이 불안정해지는 한편, 유동인구가 많아져 사회통제가 힘들어진다'는 판단하에 상인들을 차별하고 억압했다. 하지만, 백달원 같은 '상인협회 회장'은 당연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정치권력은 이들과는 기꺼이 제휴했다.</p> <p contents-hash="1228bfbd7f769148414df83f4e933bc515330a51d1bd64c388da2868f7d22494" dmcf-pid="4HtgUKyOFc" dmcf-ptype="general">백달원의 조직력을 가장 크게 활용한 인물은 이성계다. 조선 건국 4년 전인 1388년에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일으켰을 때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수송해 준 것이 백달원의 보부상 조직이다.</p> <p contents-hash="2aa01d2d3d941c0dc6ca8850c3d7de367b856e8493d6e304d98273a3af5e0b95" dmcf-pid="8XFau9WIuA" dmcf-ptype="general">역사학자이자 보성전문학교 교수였던 차상찬(1887~1946)이 쓴 <조선사외사(朝鮮史外史)>의 일부를 담은 <조선의 보부상 이야기>는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보부상들이) 자진 지원하여 군량이나 기타 치중(輜重, 군수품) 등을 모두 운반했다"고 설명한다. 조선 건국의 결정적 계기가 된 군사 쿠데타에 가담했으니, 보부상들은 조선 건국에 큰 영향을 끼친 집단이라 할 수 있다.</p> <p contents-hash="9af6cceb77380a560e6b533b767c35305636af8bbf98ead95c56d8db90904792" dmcf-pid="6Z3N72YCUj" dmcf-ptype="general">임진왜란 당시의 선조 임금을 도운 사람들도 보부상단이다. 이들은 선조를 피신시킬 때 지게로 짐을 실어 날랐다. 이 등짐장수들이 선조를 돕는 장면이 위 책에 설명돼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이야기 속의 임금이 임진왜란 때의 선조가 아닌 이괄의 난 혹은 병자호란 때의 인조일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p> <blockquote class="talkquote_frm" contents-hash="2d0e03b9c2bdaeeb7a806a74fe7667d8bc840f45b3aad62e42afb5291603baf1" dmcf-pid="P50jzVGh3N" dmcf-ptype="blockquote2"> "선조 임진왜란 때 임금이 의주로 파천을 가는 데, 중간에 말 몇 마리가 없는 것을 알고 부상들이 다가와 가마꾼으로 모시었다. 그리고 산 정상 험준한 곳에 이르렀을 때는 등에 업고 모셨고, 그 외에 식량과 군수품도 모두 그들 지게로 부상들이 운반하였다. <br> <br>따라서 이들의 도움이 컸는데, 특히 그들의 지게 작대기는 왕을 모시고 다닌 것으로 보통 사람이나 나무꾼의 작대기보다 귀중한 것이라고 하여 왕명으로 그 장신(杖身, 지게 지팡이)에다 용 모양을 조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blockquote> <div contents-hash="ae02ec3051f17438f7ef73787f99eea990ce2e278f817f778ff8e61262940914" dmcf-pid="QWZn3qSrza" dmcf-ptype="general"> <br><strong>조선 후기 늘어난 보부상</strong> </div> <p contents-hash="1b793eb7aeae3a563d13ca5cc6e6c2a60f96f0eae620b1f3b24ed04e09172385" dmcf-pid="xY5L0BvmFg" dmcf-ptype="general">이런 보부상들이 조선 후기에 많아진 것은 사회·경제적 변화의 산물이다. 이 시기 역사에서 자주 나오는 농업생산성 향상, 광작(廣作), 상품경제 및 시장 발달 등의 키워드가 이와 연관된다.</p> <p contents-hash="b72a29f8dc94aef9adfd4c7fa03c6b3e73f5b43aa827b677566fe868369956b8" dmcf-pid="yRn1NwPKFo" dmcf-ptype="general">농업생산성 향상으로 광대한 토지의 경작이 가능해지는 현상은 농민층의 계층 분화를 더 촉진했다. 종전보다 넓은 토지를 소유하거나 경작하는 농민들이 증가함에 따라, 농촌에서 지위가 약해지거나 농경지에 밀려나는 농민들도 많아졌다.</p> <p contents-hash="88fa3885021119e1a31461b111d7f0257e797596b8746d0aafaa9729636cc345" dmcf-pid="WeLtjrQ93L" dmcf-ptype="general">그런 속에서 경작지를 잃은 소작농은 물론이고, 빈농이나 고용농으로 전락한 자영농 중에는 전업을 고민하는 이들이 많았다. <백산학보> 1993년 제41호에 실린 역사학자 조재곤의 논문 '한말 근대화 과정에서의 보부상의 조직과 활동'은 이와 관련된 조선 후기의 경제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p> <blockquote class="talkquote_frm" contents-hash="aea6895e65ae4de392e7562aef86f911e07a096f0e8fa6ba5dab5cccf76fd89c" dmcf-pid="YdoFAmx23n" dmcf-ptype="blockquote2"> "화폐경제의 농촌 침투와 토지의 상품화는 농민층의 계층 분화를 촉진하였으며, 일부 지주·부농에 의한 토지 집중과 자작농의 빈농·고농화가 촉진되었으며, 다수 빈농층의 토지 상실을 초래하였다. <br> <br>그리하여 생산수단인 토지에서 유리되고 농지의 차경(借耕)에서 배제된 무전(無田)·무전(無佃) 농민은 임노동으로써 생계를 유지하거나 상공업으로 전업하기도 하고, 그것도 어려운 농민은 각지를 유리걸식하는 유랑민이 되기도 하였다." </blockquote> <div contents-hash="ecdbda48c6a00ba3bc8fc56b039fb61cb0409bd06c724bc64c7530359744ec6b" dmcf-pid="GJg3csMVFi" dmcf-ptype="general"> <br>토지 소유권을 잃은 무전(無田)농민과 경작지 임대차에서 배제돼 소작지를 잃은 무전농민(無佃)들이 임금노동자가 되기도 하고 상공업자가 되기도 하고 유랑민이 되기도 하는 이 현상이 보부상 증가의 배경이 됐다. 기존 일자리에서 배제된 몰락 농민, 특히 몰락 소작농들이 상업을 통해 자영업의 길을 나서는 현상이 조선 후기의 보부상 증가를 추동했다. </div> <p contents-hash="15120d8750cf8502be22ee495a2fbf577260d486567d13df5729c0fe4f720c9a" dmcf-pid="Hia0kORfUJ" dmcf-ptype="general">보부상으로 전업해 자영업의 길로 나서는 대중의 생계 안정을 돕는 것이 국가 상업정책의 책무여야 했다. 그러나 국가는 시전상인처럼 자금력이 좋은 상인들을 우대할 뿐이었다. 영세 상인들은 국가의 관심 밖이었다.</p> <p contents-hash="ad2ee5ddd9709702fab7ccfb0c8f7f9fcb632ce3e3ba5f026f9331996f648512" dmcf-pid="XnNpEIe47d" dmcf-ptype="general">그런데 19세기에는 보부상 조직체가 막강한 정치세력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1894년에 발생한 동학농민혁명 때는 보부상들이 농민군 진압에 참여하고, 동학혁명에 뒤이은 독립협회 활동 당시에는 이 상인들이 독립협회 탄압에 동원된다. 그러나 이는 보부상 단체의 지도부가 국가권력과 유착한 결과일 뿐, 보부상들의 전반적인 경제력 상승을 반영하지는 않는다.</p> <p contents-hash="42e0d0657abed5040687376c46fe0219458ebcc1e2432cd3aac608a058110294" dmcf-pid="ZoAuwhJ6Ue" dmcf-ptype="general">정치적 유착에 상당 부분 의존한 것이기는 하지만 19세기에 한층 유리한 고지를 점유한 보부상들은 장터 발달 등에 힘입어 세를 늘려갔다. 하지만 일본·청나라 기업 혹은 상인은 물론이고 서양 기업들의 침투가 활발해지면서 이들의 힘은 약해졌다.</p> <p contents-hash="610739740d3f30b15e4988de1e74d8d65e8022a989d3652c48cc9ac226cc27fd" dmcf-pid="5gc7rliPuR" dmcf-ptype="general">서구식 상업 문화의 파고를 넘지 못한 보부상들은 일제강점기에는 조직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정치적 힘의 원천이었던 조직력을 상실한 채 보부상 집단의 존재는 희미해져 갔다. 이들이 행상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들의 모습은 아직도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다만, 등짐을 메거나 보따리를 들었던 외형을 한 이들은 역사 속으로 거의 사라진 셈이 된다.</p> </section> </div> <p class="" data-translation="true">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p> 관련자료 이전 뉴스에서 예능으로… 김주하, 첫 비뉴스 프로그램 성공적 데뷔 11-23 다음 '매니저 배신 충격' 성시경, 안경 벗고 눈물 닦는 모습 25년 만에 처음 (규현) 11-23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한 회원만 댓글 등록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