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별이 된 故 이순재, 시대와 장르를 넘나든 70년 연기史 작성일 11-25 5 목록 <div id="layerTranslateNotice" style="display:none;"></div> <div class="article_view" data-translation-body="true" data-tiara-layer="article_body" data-tiara-action-name="본문이미지확대_클릭"> <section dmcf-sid="ZMYrotwaOK"> <div contents-hash="05f1248306b43b5f367cda70a80bf134ac8b986fb772ad2f2f63b4e77450f39e" dmcf-pid="5RGmgFrNOb" dmcf-ptype="general"> <p>아이즈 ize 한수진 기자</p> </div>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contents-hash="91083f0a8a5424b5707ca1d478532afb80c320da42402c07135d303dca9fc8ae" dmcf-pid="16vkJXcnOB" dmcf-ptype="figure"> <p class="link_figure"><img alt="고 이순재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 / 사진=파크컴퍼니 제공"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1/25/IZE/20251125101553697papv.jpg" data-org-width="560" dmcf-mid="H0Yrotwas2"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25/IZE/20251125101553697papv.jpg" width="658"></p> <figcaption class="txt_caption default_figure"> 고 이순재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 / 사진=파크컴퍼니 제공 </figcaption> </figure> <div contents-hash="a5cad830236a3793f19bf8c08ee76f6436641e1d6d2bc070c79c6bd1a1c6e7fd" dmcf-pid="tPTEiZkLDq" dmcf-ptype="general"> <p>한국 연예계를 지탱해 온 기둥이자 현역 최고령 배우 이순재가 눈을 감았다. 향년 91세. </p> </div> <p contents-hash="4aff88262656dc41d3ebc461532e62ec08c55e904efdcb72beb467bd73c0438c" dmcf-pid="FQyDn5Eowz" dmcf-ptype="general">이순재는 25일 새벽 숨을 거뒀다. 유작은 고인이 생전 "무대에서 연기하다 죽고 싶다"고 말했던 것과 닿아 있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2024)다. </p> <p contents-hash="c04b3918f8be260009e4f92494b1099027b523e5ea6aeca5c86552df2dd8c50c" dmcf-pid="3xWwL1Dgw7" dmcf-ptype="general">지난해 말까지도 그는 무대와 드라마를 오가며 연기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드러냈다. 건강 난조로 일부 일정을 취소해야 했으나,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무대에 오르고 KBS 2TV 드라마 '개소리' 촬영을 이어가며 마지막까지 현장을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 왔다. 같은 해 KBS 연기대상에서는 역대 최고령 대상 수상자로 이름을 올리며 오랜 세월 쌓아온 존재감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p> <p contents-hash="514cf08796aeb253c224d8b705460d42b480062b5082849619c9dba8cbcf7238" dmcf-pid="0MYrotwaOu" dmcf-ptype="general">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이순재는 유년기에 조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주해 전쟁과 해방을 겪으며 성장했다. 시장 좌판을 오가던 소년은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한 뒤, 대학 시절 우연히 접한 영화에 매료되면서 인생의 방향을 바꿨다. 영국 배우 로런스 올리비에가 출연한 영화 '햄릿'은 그에게 첫 결심을 남겼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p> <div contents-hash="204a6b55da5275ff10674ee1bc87569e1d280f63b307d1619d2743bed4cc20a1" dmcf-pid="pRGmgFrNsU" dmcf-ptype="general"> <p>만 21살에 1956년 연극 '지평선 넘어'로 데뷔한 그는 1965년 TBC 1기 전속 배우로 활동하며 TV 드라마 시대의 개막과 함께 대중과 만났다. 이후 출연한 드라마 목록은 일일이 언급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다. 통속극, 가족극, 시대극, 사극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았고, 한 달에 수십 편을 촬영하던 시기도 있었다.</p> </div>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contents-hash="744ec4a8fc77fd57be40a727515629321dde9bb2e992b5a9b4d87198d7f8ad2e" dmcf-pid="UeHsa3mjwp" dmcf-ptype="figure"> <p class="link_figure"><img alt="故 이순재 / 사진=스타뉴스 DB"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1/25/IZE/20251125101555148chvv.jpg" data-org-width="560" dmcf-mid="XZg6zE8BI9"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25/IZE/20251125101555148chvv.jpg" width="658"></p> <figcaption class="txt_caption default_figure"> 故 이순재 / 사진=스타뉴스 DB </figcaption> </figure> <div contents-hash="1d56c1e3399a4a0cb75807bbb72323c134c32e474b196b216842e09a21af6ad2" dmcf-pid="udXON0sAr0" dmcf-ptype="general"> <p>그가 대중에게 가장 널리 각인된 작품은 1990년대 초 방영된 가족극 '사랑이 뭐길래'다. 극 중 대발이 아버지로 불리던 가부장적 아버지 캐릭터는 시대의 분위기와 맞물리며 폭발적인 공감대를 얻었다. 해당 작품은 최고 시청률 65%라는 기록을 남겼다.</p> </div> <p contents-hash="cebdc817a111dfc03b579df2fd53e7edd10bb975f3aa029cb0251412f7f91f1e" dmcf-pid="79OgQToMw3" dmcf-ptype="general">사극 분야에서도 존재감은 독보적이었다. '인목대비' '상노' '풍운' 등 1970~80년대에 꾸준히 시대극에 출연한 그는 중년에도 '허준' '상도' '이산' 등 굵직한 작품에서 강직하고 무게감 있는 연기로 시대극의 한 축을 담당했다.</p> <p contents-hash="5738e705cfc3a52abf575f258303bc97e4e631e0204ab1e30449264aaa799122" dmcf-pid="z2IaxygREF" dmcf-ptype="general">70대에 들어선 후엔 전혀 다른 옷을 입었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근엄한 아버지 이미지를 깨고 능청스러운 코미디 연기를 펼쳤고, '야동 순재'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세대를 넘어 사랑받았다. 예능 '꽃보다 할배'에서는 특유의 지치지 않는 걸음과 명확한 판단력으로 '직진 순재'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었다.</p> <p contents-hash="f1aa83312adce52a3c8370fbc1ee346d7a352da61b78daa26867f24a2f7470c3" dmcf-pid="qVCNMWaeDt" dmcf-ptype="general">무대에 대한 애정은 생애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장수상회' '앙리할아버지와 나' '리어왕' 등에서 대사량이 방대한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했고, 특히 '리어왕'에서는 장시간 공연을 흔들림 없이 끌고 가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23년에는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 연출을 맡아 창작 영역을 확장하기도 했다.</p> <p contents-hash="73e3db26279ff55eaaf2b80284d6269a1e4d2b6b81ee921db4c482bf95f57ecd" dmcf-pid="BfhjRYNdO1" dmcf-ptype="general">연기 외적 행보도 있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약 4년간 의정활동을 펼쳤으며, 최근까지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후배 배우 양성에 힘썼다.</p> <p contents-hash="44f2dbf41ac1030f517320c6a101a4f41903b4faec0127724ab32c87948c7106" dmcf-pid="b4lAeGjJw5" dmcf-ptype="general">그의 빈자리는 크다. 수많은 시대를 통과하며 대중문화의 역사와 함께 존재해 온 배우였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강단에서, 그리고 늦은 나이에 다시 찾은 무대에서 이순재는 끊임없이 자신을 담금질하며 연기의 본질을 탐구한 배우였다. 역할의 크기나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매 작품을 새 출발점으로 삼았고, 현장이 요구하는 기준을 스스로 높여가며 연기자로서 격조 있는 태도를 마지막 순간까지 유지했다. 노년에도 방대한 대사량을 감당하며 무대를 지켜낸 체력과 집중력, 후배들에게 보여준 직업 의식, 대중 앞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아는 자세는 그 누구도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가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남게 된 이유다.</p> </section> </div> <p class="" data-translation="true">Copyright © ize & iz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p> 관련자료 이전 서예지, 故 이순재와 많은 추억.."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11-25 다음 "예술 영원한 미완성" "매 작품 유작"…이순재의 말들 11-25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한 회원만 댓글 등록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