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재, 이 시대의 국민배우가 남긴 것 작성일 11-28 13 목록 <div id="layerTranslateNotice" style="display:none;"></div> <strong class="summary_view" data-translation="true">91세로 별세…연기 인생 70년 마침표<br>연극에서 시작해 국민배우로…대중문화 역사와 함께하다</strong> <div class="article_view" data-translation-body="true" data-tiara-layer="article_body" data-tiara-action-name="본문이미지확대_클릭"> <section dmcf-sid="0NSE8dUZ0B"> <p contents-hash="96a8847eff13074ea1b582106a49229d70326b45b30ecb8f5ac427778724cd7e" dmcf-pid="pjvD6Ju53q" dmcf-ptype="general">(시사저널=하재근 국제사이버대 특임교수)</p> <p contents-hash="accebef1da3e4a24242fe33abde0388a920970d0d22146b53f0a34f02ba2d65b" dmcf-pid="UDGORgb00z" dmcf-ptype="general">배우 이순재가 11월25일 오전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사인은 노환과 폐렴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0월 건강 악화로 연극에서 하차한 뒤 정확한 근황이 공개되지 않았던 터라,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에 많은 이가 슬픔에 빠졌다. 오랜 세월 대중과 함께해온 배우였기에,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던 고인을 잃은 상실감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p>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contents-hash="b5c046537ad12bd09f4d607316dc572f5867294be1f25f553d13f5b60dc3aba7" dmcf-pid="uwHIeaKpu7" dmcf-ptype="figure"> <p class="link_figure"><img alt="향년 91세를 일기로 별세한 원로 배우 이순재의 빈소가 11월25일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사진공동취재단"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1/28/sisapress/20251128110148356vkkz.jpg" data-org-width="800" dmcf-mid="5N7bT5EoUV"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28/sisapress/20251128110148356vkkz.jpg" width="658"></p> <figcaption class="txt_caption default_figure"> 향년 91세를 일기로 별세한 원로 배우 이순재의 빈소가 11월25일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사진공동취재단 </figcaption> </figure> <p contents-hash="71e2f65031556e0b406160bf8a5fd548dacb9cf7a1674a195d544d84d985b8de" dmcf-pid="7rXCdN9U3u" dmcf-ptype="general"><strong>연극·TV·영화까지…시대와 함께 자랐다</strong></p> <p contents-hash="9c8d8d84fa318cdde9082d88af9d92253853e7205ab3543a4ed90152330e741f" dmcf-pid="zmZhJj2upU" dmcf-ptype="general">이순재는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서울로 내려와 조부모 손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 할아버지를 따라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했다고 할 정도로 집안이 매우 가난했다. 그럼에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할 만큼 학습 능력과 성실성이 범인의 수준을 뛰어넘었던 것 같다. 그는 이런 능력으로 작품을 해석하고, 평생 연기에 매진해 일가를 이뤘다.</p> <p contents-hash="e9a6d57262720f3ac23939cb1690cadabc3c187ce5921d4b7b515ea8d5377739" dmcf-pid="qs5liAV7Fp" dmcf-ptype="general">그는 대학생 시절 로런스 올리비에가 출연한 영화 《햄릿》을 보고 연기에 매료돼 신영균, 이낙훈 등과 함께 연극반을 재건했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연기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엔 동료들과 국내 최초의 동인제 극단 '실험극장'을 창단했다. 이렇게 젊은 시절을 함께한 연극이 그에겐 마음의 고향이었던 것 같다. 그는 "연기는 연극 무대에서 배워야 한다"며 "배우가 자기 연기를 구체화해 관객과 소통하는 방법은 연극밖에 없어요. 드라마나 영화도 물론 중요하지만, 연극은 직접 소통할 수 있다"고 말했다.</p> <p contents-hash="fb391880f73d795a57ef3dcd86d39e6bb7df7ab022a0d3280f00ff2c4d37108a" dmcf-pid="BO1Sncfzz0" dmcf-ptype="general">1957년 국내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인 대한방송의 드라마 《푸른 지평선》에 출연하며 방송에 발을 내디딘 그는 1961년 KBS 개국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다》를 통해 탤런트로 본격 활동을 시작했다. 1964년에 TBC 공채 1기로 발탁돼 안방극장에 자리 잡았다. 1966년 영화 《초연》으로 스크린에도 진출한 뒤 《한》 《단발머리》 《빙점》 《막차로 온 손님들》 등 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영화계에서도 활약했다.</p> <p contents-hash="11edaa7317d10a1f5ee6459a4d7fe746c9b2633919a20e65e62a6a11abf1078a" dmcf-pid="bItvLk4q03" dmcf-ptype="general">1991년 57세에 출연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는 그를 '국민 아버지'로 자리매김하게 한 대표작이다. 1992년까지 방영된 이 작품은 최고 시청률이 65%에 달할 정도로 국민적 인기를 누렸고, 한국 드라마 사상 최초로 중국에 수출돼 한류의 효시로 기록됐다. 드라마의 큰 인기에 힘입어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당선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가 목적은 아니었다. 워낙 '딴따라'라는 무시를 많이 받다 보니 연예인의 위상을 올리기 위해 출마했다고 한다. 1995년에 차기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고 연기자로 복귀했다.</p> <p contents-hash="243d845e2140722f53bb4cbc9225adf843ca18040b51b68aef6ae58f6fb846bf" dmcf-pid="KCFToE8B3F" dmcf-ptype="general">이후 《목욕탕집 남자들》 《엄마가 뿔났다》 등을 성공시키며 가부장적인 전통 아버지상을 대표하는 배우가 됐다. 사극 《허준》에서는 허준을 이끌어주는 스승 유의태 역할을 소화했고, 《이산》에선 세손을 이끌어주는 할아버지 영조로 나왔다. 이런 역할을 통해 자애롭고 엄정한 어른, 스승 같은 이미지가 생겼다. '회장님' 역할로도 많이 나왔다.</p>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contents-hash="ce77beb511a63877d733fe09b3ee6c95c35a7b0b5b36da46b652b7ffa1decd73" dmcf-pid="9h3ygD6b7t" dmcf-ptype="figure"> <p class="link_figure"><img alt="《꽃보다 할배》 스틸컷 ⓒtvn"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1/28/sisapress/20251128110149673qqav.jpg" data-org-width="800" dmcf-mid="1vB2YFrNu2"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28/sisapress/20251128110149673qqav.jpg" width="658"></p> <figcaption class="txt_caption default_figure"> 《꽃보다 할배》 스틸컷 ⓒtvn </figcaption> </figure>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contents-hash="839457abd2c5603ecb5648fbdaba901b4a9053bfc6d36f82289c0dfd78873bc5" dmcf-pid="2ItvLk4q01" dmcf-ptype="figure"> <p class="link_figure"><img alt="연극 《리어왕》 스틸컷 ⓒ더웨이브"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1/28/sisapress/20251128110150930nilw.jpg" data-org-width="800" dmcf-mid="3MCAVM3Gub"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28/sisapress/20251128110150930nilw.jpg" width="658"></p> <figcaption class="txt_caption default_figure"> 연극 《리어왕》 스틸컷 ⓒ더웨이브 </figcaption> </figure> <p contents-hash="8d3191162efc3bfe418300fb01d538429e5cde686462132319d2d014ee2c02af" dmcf-pid="VCFToE8Bz5" dmcf-ptype="general"><strong>'NG' '힘들다' '적당히'가 없었던 국민배우의 품격</strong></p> <p contents-hash="f9a99bcf8ccc9cd2160b027c982c0bfd847cd9e48e3bdecd6eb578a4c2ede37b" dmcf-pid="fh3ygD6bpZ" dmcf-ptype="general">그러나 그는 2006년 72세에 기존의 권위적이고 점잖은 이미지를 완전히 부순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지붕 뚫고 하이킥》 등을 통해 망가지는 모습도 불사하는 친근한 배우로 거듭난 것이다. '야동 순재' 캐릭터로 사랑받으면서 어린이 팬까지 생겨났다. 2013년엔 예능 《꽃보다 할배》에 출연해 '직진 순재' 캐릭터로 사랑받았다. 이런 행보를 통해 모든 연령대의 국민이 친숙하게 느끼는, 그야말로 국민배우로 자리매김했다.</p> <p contents-hash="426d565b1b842e196a0c266b5273d1404eccd92afc448c89c37d83f4087683f3" dmcf-pid="4l0WawPK0X" dmcf-ptype="general">80대엔 잇따라 연극에 도전했다. 《장수상회》 《앙리 할아버지와 나》 《리어왕》 등 고난도 연극 무대에 섰다. 연극은 드라마보다 체력적 부담이 더 크다. 작품을 한 번 할 때마다 체력이 크게 저하됐다고 한다. 그래도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2023년엔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작년 10월에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하던 도중에 건강 악화로 하차한 것이다. 그야말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연기의 열정을 불태웠다고 할 수 있다.</p> <p contents-hash="00064c9be20e5bf7fb8b504a1a197523b7e08f5c235ffc56769e96c3d9d0e524" dmcf-pid="8SpYNrQ9UH" dmcf-ptype="general">이순재의 삶은 열정과 도전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그는 생전에 '3무(無)'를 이야기했다. 'NG' '힘들다' '적당히'가 없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이기 때문에 NG를 내선 안 되고, 그러려면 대충 적당히 넘어가선 안 되고 완벽해질 때까지 힘들다고 하지 말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배우는 평생 공부하는 직업'이라고 했다.</p> <p contents-hash="698ee8d8ad0871555e201710a1439258b6e059abe2785ae68ba57bffe0d94082" dmcf-pid="6vUGjmx20G" dmcf-ptype="general">특히 대사를 외울 기억력의 감퇴를 막기 위해 미국 역대 대통령 이름을 외우는 등 지속적인 노력을 했다. 일찍부터 술, 담배를 멀리하며 체력 관리도 했다. 그 덕분인지 80대에 3시간이 넘는 연극 《리어왕》을 모두 외워서 해냈다. 이런 열정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됐다. 그가 말로 가르치지 않아도 그의 행동을 보며 후배들이 배웠다.</p> <p contents-hash="b0c0436e964573140254de89b8057e9d0d38828e2d44df542e874f452d1e8178" dmcf-pid="PTuHAsMVpY" dmcf-ptype="general">이순재의 겸허한 태도도 많은 이에게 큰 울림을 줬다. 2024 KBS 연기대상에서 드라마 《개소리》로 최고령 대상 수상자가 되었을 때, 그는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 사실 이순재 정도의 대배우면 방송사 연기대상 위에 있는 존재다. 그렇더라도 상을 별거 아니라는 듯 받으면 오만하다는 인상을 줬을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는 모습에서 겸허함의 진정성이 느껴졌고, 그게 사람들을 감동하게 했다. 그가 당시 "시청자 여러분, 정말 평생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것도 크게 회자됐다. 또 "이 상은 나 개인만의 것이 아니다"며 동료, 스태프 등에게 공을 돌리기도 했다.</p> <p contents-hash="55cdec0932a62f93d9dcffbc718420174313f627a5e3e140f2dfed7deea0621f" dmcf-pid="Qy7XcORfuW" dmcf-ptype="general">연예인들을 괴롭게 하는 것 중 하나가 촬영장에서의 하염없는 기다림이다. 과거엔 원로들이 나오는 장면을 먼저 찍는 관행이 있었다. 하지만 이순재는 "왜 나 때문에 후배들이 기다려야 하느냐"면서,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몇 시간이고 기다렸다고 한다. 그는 선배라고, 원로라고 후배들에게 자신을 내세우면 안 된다는 말도 했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태도가 오히려 그를 더 높게 만들었다. 그는 아버지 같으면서 동시에 친구 같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더 많은 젊은이가 그를 우러른 것이다.</p> <p contents-hash="e81b24a276bf94056ecc6e950c46b336e85bf00c519638d0e18146637d187421" dmcf-pid="xXKFrSnQUy" dmcf-ptype="general">가천대 석좌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연기대상 소감 중에 학생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만큼 애정을 다해 후학을 길렀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자신의 후학을 길러내며 열정과 철학을 세상에 남겼다. 생전에 "내가 숨 쉬는 동안 무대와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나의 숙명"이라고 했었는데, 정말 체력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무대 위에 있었던 진정한 국민배우였다.</p> <p contents-hash="c9f9ebec434a06c123e05c3e69f33571d90c43d0674a4f67786bf5ed5c1d4e6f" dmcf-pid="yJmgb65TpT" dmcf-ptype="general">정부는 고인에게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추서했다. 그의 삶은 한 배우의 기록을 넘어 대중문화의 역사이자, 세대가 공유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p> </section> </div> <p class="" data-translation="true">Copyright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p> 관련자료 이전 디지털크리에이터미디어산업 매출 5조5503억원…광고·커머스 급성장 11-28 다음 '기차와 소나무' 이규석, 오늘(28일) 부친상 11-28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한 회원만 댓글 등록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