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男과 결혼·이혼' 김지미 "난 마누라 필요"·"사랑하니 헤어져" 발언도 재주목 작성일 12-10 11 목록 <div id="layerTranslateNotice" style="display:none;"></div> <div class="article_view" data-translation-body="true" data-tiara-layer="article_body" data-tiara-action-name="본문이미지확대_클릭"> <section dmcf-sid="W5tbRM4q5K">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contents-hash="13a11349ee3a5464876ef077d1175905229195e75356b78cbc4615b4396fbee2" dmcf-pid="Y1FKeR8B1b" dmcf-ptype="figure"> <p class="link_figure"><img alt="원로 영화배우 김지미(본명 김명자) / 뉴스1"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2/10/NEWS1/20251210145120362atji.jpg" data-org-width="1400" dmcf-mid="5EmDLnMVtk"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2/10/NEWS1/20251210145120362atji.jpg" width="658"></p> <figcaption class="txt_caption default_figure"> 원로 영화배우 김지미(본명 김명자) / 뉴스1 </figcaption> </figure> <p contents-hash="5b5b155a9533e77db1bcb53e67ca921cda3d4b1762034c5e91a2a9e0f0547cef" dmcf-pid="Gt39de6bGB" dmcf-ptype="general">(서울=뉴스1) 정유진 기자 = 60년대~70년대 은막의 스타, 원로 배우 김지미(본명 김지미)가 향년 85세 일기로 세상을 떠난 가운데, 솔직한 화법으로 화제를 모았던 고인의 생전 발언들도 재주목받고 있다.</p> <p contents-hash="cbcf7c4a4d767538615c7a1dd92c7f0e68d4881d61d121b2eb54c04f644fd7df" dmcf-pid="HF02JdPKXq" dmcf-ptype="general">10일 영화배우협회에 따르면 김지미는 지난 9일(한국 시각) 미국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 절차 및 형식에 대해서는 논의 중이다. 영화배우협회에 따르면 국내에서 영화인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p> <p contents-hash="b8d3671cd125d3388e8755bea04ebb2d2ed1b9b57df4558920bfb6baea4fd4d6" dmcf-pid="X3pViJQ9Zz" dmcf-ptype="general">1940년생인 김지미는 1957년 '황혼열차'의 주연으로 영화계에 데뷔, 이듬해 '별아 내 가슴에'를 통해 스타가 됐다. 이후 '비오는 날의 오후3시'(1959) '바보온달과 평강공주'(1961) '장희빈'(1961) '혈맥'(1963) '이수일과 심순애'(1965) '토지'(1974) 등의 작품을 통해 60~70년대 최고의 배우로 이름을 떨쳤다.</p> <p contents-hash="27baf37f24b4da5048c2cac30863c359b0450f42266fe567be7262643680469d" dmcf-pid="Z0Ufnix217" dmcf-ptype="general">1980년대에도 활발하게 활동했던 김지미는 '비구니'(1984) '길소뜸'(1985) '티켓'(1986) 등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 출연, 탁월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1985년에는 '지미필름'을 창립해 '티켓'(1986) '아메리카 아메리카'(1988) '불의 나라'(1989) '아낌없이 주련다'(1989) '물의 나라'(1989) '명자 아끼꼬 쏘냐'(1992) 등의 작품을 제작했다. 2016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p> <p contents-hash="6b857c50e432039dec275939fc06abc4c0b2d0fe8e6dae33c3144136e5748bf4" dmcf-pid="5pu4LnMV5u" dmcf-ptype="general">평생을 화려한 스타로 살아온 고 김지미는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으며, 당대 '미인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톱스타였던 만큼 개인사적으로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1958년, 만 18세에 16세 연상의 영화 감독 홍성기와 첫 번째 결혼을 한 김지미는 슬하에 자녀를 두었지만, 1962년 이혼했다.</p> <p contents-hash="8164345ac89d87b00fb1a5be30b3973a7d5524ded390fc647225086a4f27d184" dmcf-pid="17qPagd8ZU" dmcf-ptype="general">이어 김지미는 당대 인기 배우인 최무룡과의 스캔들로 '세기적인 로맨스'의 주인공이 됐다. 1962년 유부남이었던 최무룡과의 교제로 인해 간통죄로 그와 함께 구속된 김지미는 1963년 최무룡과 재혼했다. 이후 두 사람은 슬하에 딸을 두고 살았지만, 최무룡의 계속되는 영화 제작 실패로 1969년 이혼했다. 최무룡과 이혼을 발표할 당시 김지미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로 화제를 모았다.</p> <p contents-hash="25e6233f8c8b28a82ec878076616dd64665eaca0c8e067bfbadaa6f5387143e1" dmcf-pid="tzBQNaJ6Yp" dmcf-ptype="general">1976년, 김지미는 또 한 번의 스캔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당대 톱 가수인 7세 연하 가수 나훈아와의 열애였다. 두 사람은 혼인신고나 결혼식 없이 1976년부터 1982년까지 사실혼 관계를 맺었다. 나훈아와 헤어진 후 김지미는 1991년 심장 질환 전문의 이종구 박사와 네 번째로 결혼했지만 11년 만에 헤어졌다. 훗날 김지미가 이종구 박사와의 결혼 생활에 대해 "나는 마누라가 필요한 사람이지 남편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p> <p contents-hash="2ceebda4310a45febe62145d09336a5fca74c7efe235b45e2dd9e5e9c45993ba" dmcf-pid="FqbxjNiPt0" dmcf-ptype="general">이처럼 김지미는 생전 거침없는 화법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는 과거 매체 인터뷰에서 "평생 매 맞을 각오하고 나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았다"고 말하거나 "나는 나 자신에게 충실하다, 나는 행동이나 말이나 거짓이 없다, 그게 내가 사는 방식이다, 참고 속이고 위선 떨고, 나는 그런 것을 못 한다"고 말하며 솔직한 성격을 드러냈다.</p> <p contents-hash="4c891878882d1087354ce6c2f1297a9f35ff829b54fdb6d0ba8faa6bc7069065" dmcf-pid="3BKMAjnQt3" dmcf-ptype="general">eujenej@news1.kr </p> </section> </div> <p class="" data-translation="true">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p> 관련자료 이전 정재형, 박나래 '주사 이모' 친분설 부인…"일면식도 없어" 12-10 다음 '감옥 사무실 논란' 원지, 구독자 추락 중 방송 출연..3차 사과에도 여파 계속 [스타이슈] 12-10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한 회원만 댓글 등록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