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지미, 영광과 논란을 모두 품은 '한국영화의 여걸' [IZE 진단] 작성일 12-12 8 목록 <div id="layerTranslateNotice" style="display:none;"></div> <div class="article_view" data-translation-body="true" data-tiara-layer="article_body" data-tiara-action-name="본문이미지확대_클릭"> <section dmcf-sid="7MTehk9Uwk"> <div contents-hash="dd0af172aaa4be982fdf9cbbc6ec65d04302bb460ff7361c361a312fd807e21d" dmcf-pid="zRydlE2uEc" dmcf-ptype="general"> <p>아이즈 ize 김형석 영화평론가</p> </div>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contents-hash="6380c6c7d3934d89c9293e9888ef0a9a66c2d6516784c7da0d4790011be2aa7b" dmcf-pid="qeWJSDV7wA" dmcf-ptype="figure"> <p class="link_figure"><img alt="故 김지미 / 사진=영화 '길소뜸' 스틸 컷"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2/12/IZE/20251212164250116qbwb.jpg" data-org-width="500" dmcf-mid="YKgFR2vmrT"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2/12/IZE/20251212164250116qbwb.jpg" width="658"></p> <figcaption class="txt_caption default_figure"> 故 김지미 / 사진=영화 '길소뜸' 스틸 컷 </figcaption> </figure> <div contents-hash="0621785da1d592937c0f87ab7232a0bc4139b592f4451469e813127205dd6763" dmcf-pid="BdYivwfzIj" dmcf-ptype="general"> <p>배우 김지미가 세상을 떠났다. 1950년대에 데뷔해 1990년대까지 배우로 활동했고, 이후 영화 제작자가 됐으며, 영화인협회를 통해 충무로 세력을 이끌었던 그는 흔히 '여걸'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던 인물이었다. 영광만 있던 건 아니었다. 여러 구설수가 있었고, 후배 세대 영화인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럼에도 '김지미'라는 스타는 한국영화사를 이야기할 때, 때론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얼굴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이름이다.</p> </div> <p contents-hash="dd37140299b0c14e142db768c3696a9068d4308c8b8bf413025de2ef9b76a0ff" dmcf-pid="bv8y2pwaIN" dmcf-ptype="general">1940년에 태어난 김지미는 18살 때 데뷔했다. 친척이 운영하는 다방에 놀러갔다가 김기영 감독의 눈에 띄었고, 고등학교 3학년 때 첫 영화 '황혼열차'(1957)에 출연했다(이 영화는 안성기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이후 홍성기 감독을 만나 1958년에 '별아 내 가슴에'로 스타덤에 오른 그는, 같은 해 홍성기 감독과 결혼했다. 한참 오름세에 있는 19살의 어린 여배우가 결혼한다는 사실 자체가 큰 충격이었는데, 그들의 결혼 생활은 4년 만에 막을 내린다.</p> <div contents-hash="a95114a2622f80f4f1050c79ec048a45f3aab8158594103b8c066fefaaceb5e4" dmcf-pid="KT6WVUrNsa" dmcf-ptype="general"> <p>김지미는 한국영화의 황금기였던 1960년대를 상징하는 배우 중 하나였다. 청춘 스타였던 신성일과 엄앵란, 문희-남정임-윤정희의 트로이카, 김승호나 신영균 같은 선 굵은 남성 스타, 최은희나 문정숙 같은 카리스마 여배우, 허장강 같은 개성파 연기자들 사이에서 그는 멜로드라마의 히로인이 되었다. 아름다운 외모로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별명을 얻긴 했지만, 김지미는 어떤 이미지로 규정할 수 있는 배우가 아니었다. 팜므파탈이나 악녀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의 캐릭터엔 연약한 내면이 있었고, 서구적인 외모를 지녔으면서도 사극이나 전통적인 모성 연기도 품을 수 있었다. 당시 트렌드가 멜로 장르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도할 수 있는 연기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 김지미는 외모를 넘어서는 열정과 몰입으로 스펙트럼을 넓혀갔다.</p> </div>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contents-hash="a72d388b6d28297e55f9ed5fc5e5f48c8be42b39805da37bcf1ddcfcd815b542" dmcf-pid="9yPYfumjrg" dmcf-ptype="figure"> <p class="link_figure"><img alt="故 김지미 / 사진=영화 '비구니' 스틸 컷"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2/12/IZE/20251212164251386nrur.jpg" data-org-width="600" dmcf-mid="H1O8wou5mS"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2/12/IZE/20251212164251386nrur.jpg" width="658"></p> <figcaption class="txt_caption default_figure"> 故 김지미 / 사진=영화 '비구니' 스틸 컷 </figcaption> </figure> <div contents-hash="b7e313f0a11029b8caf7eab360098da355bdc0738386df32cb2b7cd366ac3c13" dmcf-pid="2WQG47sAIo" dmcf-ptype="general"> <p>1970년대는 한국영화가 위기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TV의 빠른 보급으로 엔터테인먼트의 격변이 있었고, 충무로는 이른바 호스티스 무비를 통해 선정성에 젖어들었다. 이때 김지미의 선택은 트렌드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는 TV 출연을 하지 않았고, 선정주의와 손잡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원군'(1969) '잡초'(1974)로 백상예술대상, '너의 이름은 여자'(1969)로 청룡영화상, '토지'(1974)와 '육체의 약속'(1975)으로 대종상 등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 받기 시작했다. </p> </div> <p contents-hash="d6629338213d96d2a51797cac14a666dabed217065d7c808ccc2f7efeb01b7c1" dmcf-pid="VYxH8zOcmL" dmcf-ptype="general">흥미로운 건 대중과의 관계였다. 그는 사랑받는 여배우였지만, 한편으로는 미움 받는 셀러브리티였다. 배우 최무룡과의 결혼과 관련된 스캔들, 연하의 톱스타였던 나훈아와의 결혼과 이혼 등을 통해 김지미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쌓았다. </p> <div contents-hash="0d7cc446ff9d22efb74e160837ee11b2e90333154abd1039d27a6e98fdc8ea53" dmcf-pid="fGMX6qIkIn" dmcf-ptype="general"> <p>그럼에도 동시에 그는 배우로서 업적을 쌓아갔고, 중년에 접어든 1980년대엔 앞서가는 행보를 보인다. 결국 무산되었지만 임권택 감독의 '비구니'에서 삭발을 감행하며 열연을 펼쳤고, 이후 '지미필름'을 설립해 '티켓'(1986)을 제작한다.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티켓'에서 그가 보여준 리얼한 연기와 성우 더빙 톤을 걷어낸 허스키한 육성은, 삶의 신산이 녹아 있는 연기였고 40대 중반의 나이에 과감한 노출을 보여주기도 한다.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1986) 역시 김지미라는 배우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이산가족의 아픔을 다룬 이 영화에서 김지미가 보여주는 정적이면서도 밀도 높은 연기를 보여준다.</p> </div>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contents-hash="42dd8ef2601214417b4247132c816e069c0da1bf9db3121232ccc7e7d90c5bf6" dmcf-pid="4HRZPBCEsi" dmcf-ptype="figure"> <p class="link_figure"><img alt="故 김지미 / 사진=스타뉴스 DB"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2/12/IZE/20251212164252645ngqz.jpg" data-org-width="600" dmcf-mid="u86WVUrNIE"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2/12/IZE/20251212164252645ngqz.jpg" width="658"></p> <figcaption class="txt_caption default_figure"> 故 김지미 / 사진=스타뉴스 DB </figcaption> </figure> <div contents-hash="80ab5a51c0273b822ee1a36831d4af77c64112786d8cc16143926bb075c754ad" dmcf-pid="8v8y2pwawJ" dmcf-ptype="general"> <p>그러면서 그는 여배우의 대명사가 되었고, 직접 제작한 이장호 감독의 '명자 아끼꼬 쏘냐'(1992)에서 주연을 맡는다. 자신의 본명인 '김명자'를 내세운 이 영화는 일제 강점기부터 현대를 아우르는, 한 개인의 에픽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특히 노년의 '쏘냐'를 연기할 때의 김지미는, 그의 연기 인생을 아우르는 깊이를 보여준다. 이후 김지미의 행보도 독특하다. 그는 여장부적인 기질을 발휘해 충무로 영화인들의 중심이 되었고, 때론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영화계 현안에 대해 끊임없이 발언하고 행동했다.</p> </div> <p contents-hash="25e28d19a046bcc2c8e24368c4f84ad94f9f70c5da490f75e053e8cb1996b472" dmcf-pid="6T6WVUrNId" dmcf-ptype="general">최근 이순재 선생에 이어 김지미, 윤일봉 등 고전기를 장식했던 원로 배우들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들의 공과를 따지기 전에, 한국영화의 열악한 시대를 살았던 영화인들에 대한 추모와 고마움의 마음을 지녀본다. 특히 '배우 김지미'가 남긴 독보적인 발자취와 빛나는 이미지는 우리 영화의 중요한 유산일 것이다.</p> <p contents-hash="8303f69b77cc48704c8921305c476e4ff6871fbd246d8902a9515d626091366d" dmcf-pid="PyPYfumjwe" dmcf-ptype="general">김형석(영화평론가)</p> </section> </div> <p class="" data-translation="true">Copyright © ize & iz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p> 관련자료 이전 넥슨, 롯데시네마와 손잡고 ‘블루 아카이브’ 4주년 기념 영화 개봉 12-12 다음 한효주 찍은 필름사진, 사진집으로 발간 “작년 한해의 따뜻한 기록” 12-12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한 회원만 댓글 등록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