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트? 바보야! 문제는 구단이야"...거품이라면서 샐러리캡 무력화

작성일 12-13

<div style="text-align:center"><img src="https://imgnews.pstatic.net/image/053/2025/12/13/0000054240_001_20251213040006571.gif" alt="" />지난 11월 23일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 팬 페스티벌 ‘곰들의 모임’에서 FA계약으로 두산에 합류한 박찬호(왼쪽)가 동료 선수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있다. photo 뉴시스</div> 이상한 일이다. FA(프리에이전트) 시장에 참여하는 구단들이 한목소리로 '거품'을 외치는 현상 말이다. '프리'라는 말 그대로 이 제도는 참가자들의 자유의지를 전제로 한다. 선수를 사고 싶으면 사고, 필요 없거나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면 안 사면 그만이다. 아무도 구단들더러 그 돈을 주고 사라고 강요하거나 칼 들고 협박하지 않았다. 80억원, 100억원을 선수 하나에 '태우기로' 선택한 건 바로 구단들이다. 부르는 게 곧 값인 경매식 시장에서 선수 몸값을 천정부지로 올려놓은 것도 바로 구단들이다. 그런데 이 구단들은 '프리' 에이전트 시장이 마치 '프리'하지 않은 것처럼 불만을 토해낸다. 선수 몸값이 실제 가치에 비해 지나치게 높게 책정돼 있고 거품이 심하다고, 에이전시가 특급 선수들을 독과점해서 몸값을 부풀린다고, 선수들이 과도한 돈을 요구해서 힘들다고, 이대로 가면 KBO리그의 앞날이 크게 어둡다고 묵시록을 쓴다. 마치 명품 매장에서 고가의 가방과 구두를 잔뜩 지른 뒤 백화점과 브랜드를 욕하며 '과소비는 내 탓이 아니다'라고 떼쓰는 사람을 보는 느낌이다.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남들은 생각도 안 하는 거액을 외쳐놓고 정작 낙찰돼서 돈을 내게 되자 경매장을 탓하는 사람 같기도 하다. 매년 등장하는 거품론 구단들이 이런 식으로 군 건 올겨울만의 일이 아니다. 'FA 거품'이란 말이 처음 언론에 등장한 건 지난 2001년. 1999년 FA 제도를 도입한 지 3년 만에 시장에 거품이 끼었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2001년 11월 한 기사엔 '최근 FA 거품론이 대두되면서 예년과 달리 FA 선수를 붙잡으려는 구단들의 움직임이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2003년 기사에도 'FA 금액의 거품이 너무 크다'는 주장이 실렸고 2004년 YTN 기사엔 '구단들이 한결같이 FA 시장의 거품론을 얘기하고 있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같은 해 기사들엔 '몸값엔 상당한 거품이 끼어있다는 게 각 구단 관계자들의 인식' '국내 프로야구의 현실을 감안해 볼 때 FA들의 몸값 거품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지금처럼 FA 계약이 계속되면 향후 몇 년 내로 몇 개 구단은 파산해야 할 지경이라는 위기의식이 팽배하다'는 대목들이 나온다. 마치 며칠 전 신문 내용을 다시 보는 듯하다. 구단들은 FA 제도를 시행한 이래로 늘 거품을 하소연했고 몸값이 비싸다고 징징거렸다. 이대로 가면 프로야구가 위태롭다고 위기론을 조장해왔다. 그러면서도 정작 시장에선 거액을 펑펑 쓰면서 스스로 몸값 거품을 만드는 행태를 되풀이한다. 에이전트 제도가 없던 시절엔 거액을 요구하는 선수들을 비난하더니 이제는 선수 대신 협상에 나오는 에이전트를 악마화하는 방식으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도 판박이다. 선수, 에이전트를 욕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선수가 보다 많은 돈을 받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욕망이다. 에이전트는 선수가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좋은 계약을 하도록 도와주는 게 존재 이유다. 선수 입장에선 자기 가치를 극대화해서 더 많은 돈을 받게 해주는 에이전트가 최고다. 올겨울 '독과점'이라고 비난받는 리코스포츠가 가장 많은 선수를 보유한 것도 이런 원리가 작동한 결과다. 선수와 에이전트가 어떻게든 자신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좋은 계약을 따내려고 노력한다면, 그에 대응하는 구단 역시 맞서서 협상력을 발휘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다. 대부분의 구단들은 협상에서 선수와 에이전트가 요구하는 대로 끌려다니고 여론을 살피다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실제 가치를 훨씬 뛰어넘는 계약을 덥석 안기기 일쑤다. 그래놓고는 '거품' 낀 시장과 선수, 에이전트를 비난한다. 비난 여론 때문에 거액 쓰는 구단 당장 올겨울 FA 계약 사례들을 보자. 한화 이글스는 강백호에게 4년 100억원의 계약을 안겼다. 강백호는 '공공의 적' 리코 소속도 아니다. KT 위즈는 최원준과 4년 48억원에 계약했다. 원소속팀 NC가 생각한 조건은 앞자리가 4가 아닌 3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별한 경쟁도 없는데 뭐에 쫓기듯 거액을 주고 계약했다. 계약 발표 보도자료에 이런저런 설명을 하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그 금액이 어떤 기준과 근거를 갖고 정해졌는지, 왜 선수에게 그 돈을 투자하는지, 투자한 만큼 그 이상의 가치를 어떻게 회수할 것인지 정량적으로 설명한 경우는 보기 어렵다. 사실 성적만 놓고 따지면 대부분의 FA 선수들은 절대로 받는 돈만큼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선수의 기여도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WAR(대체선수 대비 기여승수)라는 지표가 있다. 2025년 기준 KBO리그에서 1WAR의 가치는 6억원 정도로 분석된다. 계약기간 4년간 100억원만큼의 활약을 하려면 강백호는 연평균 WAR 4승 이상을 올려야 한다. 그런데 지난 4년간 강백호가 올린 WAR 합계는 4.57승에 불과하다.KT 최원준도 WAR 8승 이상을 해줘야 하는데 최근 4시즌 WAR 합계는 4.33승에 불과하다. 성적만 보면 이만큼의 돈을 지불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 계약들이다. 만약 메이저리그 구단들처럼 성적 이외의 가치로 투자한 금액 이상을 회수한다는 확신이 있다면 납득할 수 있다. 오타니 쇼헤이와 7억달러 계약을 맺은 LA 다저스는 오타니를 통해 티켓 판매, 중계권료, 광고, 유니폼 판매로 연간 수천만 달러의 부가수익을 거둔다는 계산으로 거액을 투자했다. 실제 오타니는 야구장 안팎에서 몸값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국내 구단들이 과연 그렇게 계산기를 두드려보고 거액을 투자했는지는 의문이다. 당장 올겨울 계약한 선수 중에 오타니처럼 야구 외적 가치를 창출할 만한 선수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두산 팬들이 박찬호 유니폼을 80억원어치 구매할까. 한화 팬들이 강백호 굿즈를 100억원어치 사줄까. 물론 구단들도 고충은 있다. 원하는 선수를 잡지 못하고 프랜차이즈 선수를 다른 팀에 뺏기면 무지막지한 비난 여론과 마주해야 한다. FA에 거액을 쏟으면 오버페이라고 비난받고, 돈을 안 쓰고 합리적 투자를 하려고 하면 반대로 '전력보강 의지가 없다'고 욕먹는다. 당장 올겨울 박찬호와 최형우를 다른 팀에 뺏기면서 가공할 비난 여론에 시달린 KIA 타이거즈가 대표적이다. 엘리트 선수 수가 극히 제한적인 리그 환경도 구단들을 옥죈다. 국내 리그에서 꾸준하게 뛰어난 성적을 거두는 엘리트 선수는 매우 한정적이다. 42세 최형우가 2025년 KIA 팀 내 WAR 1위 타자였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좋은 선수를 찾는 수요는 많은데 엘리트급 선수 공급은 적다 보니 소수 엘리트급 선수의 몸값이 폭등하는 구조다. 유불리 따라 없애는 제도 그렇다고 구단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정당화하기 어렵다. 겉으로는 몸값 거품을 운운하면서 정작 자기들이 만든 샐러리캡 제도는 무력화하려 시도하는 게 구단들이기 때문이다. 샐러리캡은 2020년 구단들이 직접 만든 제도였지만, 막상 제도대로 운영하기 힘들어지자 상한액은 올리고 벌금은 깎고 제재는 폐지하며 사실상 무력화했다. 활발한 선수 이동 통로가 될 수 있던 2차 드래프트도 각종 '개악'으로 지명 대상 선수 풀을 말려버렸고, 결국 올해 열린 2차 드래프트는 '패스'와 악성 FA 계약 땡처리로 점철됐다. 몸값 거품을 없애자는 취지로 자기들이 만든 제도를 자기들이 무력화한다. 선수 이동을 통해 전력균형을 이루고 선수 공급을 활발하게 만들 수 있는 제도 역시 무의미하게 만든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다. 여기엔 한국야구의 태생적 한계가 있다. KBO리그 구단들 중 자체적으로 수익을 내는 구단은 거의 없다. 정권 압력에 의해 재벌 대기업의 '사회공헌' 차원에서 탄생한 리그다. 이후 40년 넘게 지났지만 여전히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벌어들이는 돈에 비해 지출은 터무니없이 높은 적자 구조가 모기업 지원금으로 유지된다. 겨울 FA 시장 투자는 구단 사장과 단장이 모기업에 가서 읍소해서 지원금을 받아내는 식으로 이뤄진다. 구단이 추구하는 방향성은 중요하지 않다. 오너의 결단, 오너의 선심에 의해 FA 투자도 구단의 운명도 갈린다. 모기업 상황이 안 좋고 오너의 심기가 불편하면 아무리 구단이 필요해도 투자가 불가능하다. 구단에서는 아니라고 판단해도 '본부' 지시에 따라 불필요한 투자를 하는 경우도 있다. 계산상으로는 말이 안되는 투자가 반복되는 이유다. 마케팅 전문가인 김경민 단국대 겸임교수는 FA 거품을 비판하는 소셜미디어(SNS) 글에서 "모기업은 왜 이런 거액의 집행을 승인하는 것인가? FA 선수 영입이 구단과 모기업에 선사하는 가치나 효용과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 아마 없을 것"이라며 "이런 건 주식회사의 비즈니스라 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FA 선수 계약은 구단 입장에서 볼 때 일종의 '투자'이고 투자엔 언제나 그 이상의 가치를 회수할 수 있다는 전제가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기 내 성적에만 급급 LG나 두산, NC 같은 일부 구단을 제외한 대부분 구단 사장과 단장은 3년 이내의 짧은 임기를 보장받는다. 모기업 인사이동에 따라 1년 만에 사장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임기를 보장받지 못한 사장·단장들은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임기 내 성적이나 단기 성과에만 골몰한다. 이 선수를 데려왔을 때 구단이 몇 년 뒤 어떻게 될지, 이런 제도를 도입하면 나중에 야구계나 구단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고려하기보다는 내 임기 내에 성적만 내면 그만이다. 욕먹기도 싫어한다. 구단에서 합리적인 프로세스에 따라 어떤 결정을 했으면 여론을 설득하고 당당하게 비전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생각도 능력도 없다. 어떻게든 모기업 회장님에게 여론 비난의 불똥이 튀지 않게 하려고 애쓰고, 여론을 설득하기보단 홍보팀 뒤에 숨어서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야구계에 다른 큰 이슈가 터져서 비난이 물타기되기만 기다린다. 선수 몸값 거품이 심하면 문제 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나 리그 발전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데 자기 임기 내의 일이 아니니 관심이 없다. 어떤 제도를 만들어도 몇 년 뒤 새로운 사장과 단장이 오면 손바닥 뒤집듯 엎어 버린다. 야구를 모르는 경영진이 와서 임기만 채우고 지나가니 한국야구의 미래를 좌우할 중대사가 모기업 사정에 따라 오락가락한다. 이런 걸 프로스포츠라고 부를 수 있나. 올겨울에도 구단들은 자기들이 높인 선수 몸값과 자기들이 만든 거품의 책임을 선수들과 에이전트에 전가하려고 노력 중이다. 10개 구단 사장단은 최근 KBO 허구연 총재를 만나 에이전시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민원을 넣었다. 지난 12월 초 열린 윈터미팅에서도 실무진들이 에이전트 제재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12월 중순 열리는 실행위원회에서 논의를 이어갈 예정이다. 이걸로 에이전트 목줄을 채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몸값 거품을 잡는 데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거품을 만든 건 구단들 자신이고, 구단들은 이 거품을 멈출 생각도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예언하건대 내년에도 이맘때쯤이면 구단들은 몸값 거품이 심하다며 이대로는 리그 존속이 어렵다고 아우성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주제의 원고를 또 쓰게 될 것 같다. 어떻게 아냐고? 작년에도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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