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본질은 '저항'... 1세대 영화평론가의 철학은 이랬다 작성일 12-14 9 목록 <div id="layerTranslateNotice" style="display:none;"></div> <strong class="summary_view" data-translation="true">[서평] '영화사가 노만'...한국영화사 최초 집필한 1세대 영화평론가</strong> <div class="article_view" data-translation-body="true" data-tiara-layer="article_body" data-tiara-action-name="본문이미지확대_클릭"> <section dmcf-sid="qxEagQXSuj"> <p contents-hash="ad51dce5ac5d56ed42cc9245ff6d098f54de91275f5c3e73811fe543b6ca57ef" dmcf-pid="BMDNaxZv0N" dmcf-ptype="general">[성하훈 기자]</p>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f7b66139273105d7973c2d7f2caf8271eccb71d928c5f3d1517ecbc4274311ac" dmcf-pid="bRwjNM5Tua"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2/14/ohmynews/20251214163248738ocnu.jpg" data-org-width="458" dmcf-mid="uJ65ZhMVuk"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2/14/ohmynews/20251214163248738ocnu.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strong> <영화사가 노만> 표지</td> </tr> <tr> <td align="left">ⓒ 한상언영화연구소</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52a068c5f417a3a0b25cf15ecd7235ea20201268fdc992411ef17e07ed567696" dmcf-pid="KerAjR1y0g" dmcf-ptype="general"> 2022년 4월 13일. 원로 영화평론가 김종원은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란다. 1960년대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세워질 때 함께 활동했던 노만이 연락해 온 것이었다. 1970년대 소식이 끊긴 후 생사를 알 수 없었고 죽은 줄만 알았는데, 50년이 넘어 걸려온 전화에 김종원 평론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div> <p contents-hash="634a75a1b4c2fa30b17d73d281167376f611a6ca98ce568b799c7e9bdab7eb25" dmcf-pid="9dmcAetWFo" dmcf-ptype="general">노만. 본명은 노만길. 1935년 평안남도 용강 태생. 일반 관객들은 낯선 이름이지만 영화사 연구자들에게는 꽤 알려진 인물이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한국영화 초창기 영화잡지사를 시작으로 영화계에 받을 디뎠고, 한양대학교와 중앙대학교, 한국배우전문학원 등에서 강의에 나선 학자이자 1세대 영화평론가다.</p> <p contents-hash="a59b2299534bd8e48ad946a02a53d071088d92a3ba487ddd978a0a270be44824" dmcf-pid="2F8KbtcnFL" dmcf-ptype="general">무엇보다 <한국영화사>를 처음 집필했다는 것은 영화평론가 노만의 이름이 영화사 연구자들의 기억에 남겨진 이유다. 일제 강점기 조선영화로 시작된 한국영화사를 통사로서 가장 먼저 정리했다는 것은 영화사 연구에 큰 의의가 있다. 1962년 잡지에 연재하던 내용을 철필 등사본으로 묶은 <한국영화사>는 정식 출판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복사본으로 만들어져 오랜 시간 떠돌며 전해져 내려왔다. 덕분에 노만의 등장과 함께 2023년 저술 60년 만에 한 권의 책으로 발간되기에 이르렀다.</p> <p contents-hash="8b47506cf0703d95d29ee836dcc0b5fa0636e4e628237909346ec1192576159f" dmcf-pid="V369KFkLpn" dmcf-ptype="general">영화연구자 유창연 박사가 정리한 <영화사가 노만>은 살아있는 한국영화의 역사로 평가받는 노만 선생의 일생을 통해 한국전쟁 이후인 1950년대부터 1970년까지 한국영화의 모습을 톺아볼 수 있는 특별한 책이다. 노만이 썼던 글과 기사, 각종 인터뷰 등을 바탕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국영화의 많은 에피소드를 담아내고 있다.</p> <p contents-hash="2c6e550d119e3a77ae906e4829a8d5973a3d9e9578273f181081de42dbe237eb" dmcf-pid="f0P293Eo7i" dmcf-ptype="general"><strong>영화인 인터뷰 바탕으로 '한국영화사' 서술</strong></p> <p contents-hash="92c1967bda44d9e811d2af880f157edbdb108dcd2ffbd1dd0258f00b257cc2b8" dmcf-pid="4pQV20Dg0J" dmcf-ptype="general">노만이 한국영화계에 첫발을 디딘 것은 서울대 재학시절인 1954년이었다. 해방 이후 1946년 가족과 함께 월남한 노만 선생은 한국전쟁 시기 서울고에 재학 중이었고,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54년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에 입학한다.</p> <div contents-hash="5c8a207e49984e6959f10aba619e6db248c1443307fb468ebc08f03781830640" dmcf-pid="8UxfVpwaud" dmcf-ptype="general"> 대학 1학년 2학기 때인 1954년 9월 영화잡지 <영화세계>에 입사하면서 영화기자로 나서게 된 것이 영화계와의 첫 만남이었다. 이때 찾아다니며 만났던 영화인들은 지금은 대부분 고인이 된 전창근 감독, 유현목 홍성기 감독, 김학성 촬영감독과 생존해 있는 정일성 촬영감독 등이었다.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ea3209fadc2fe771ba67d057a8fa8a0f29eca86a4430ea15234de0192da33f8a" dmcf-pid="6uM4fUrN7e"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2/14/ohmynews/20251214163250000lvyo.jpg" data-org-width="700" dmcf-mid="7RBvSE2uuc"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2/14/ohmynews/20251214163250000lvyo.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strong> 1955년 <영화세계> 기자 시절 영화세계사 대표 박인규(오른쪽)와 그의 형 박인수(왼쪽)과 함께 명동거리에서 노만(가운데)</td> </tr> <tr> <td align="left">ⓒ 한상언영화연구소</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55d48ce4099538f3bff376d19dd5c5ddb001d7361a8e7e4b0f0cf0dae02fb074" dmcf-pid="P7R84umj3R" dmcf-ptype="general"> 노만은 1950년대 한국영화의 풍경에 대해 '영화사들이 잇따라 생겨났으나 사무실을 따로 얻기에는 임대료도 비쌌고, 영화가 흥행이 안 되면 월세를 낼 수도 없어 주로 명동의 다방에서 모든 일이 결정됐고 영화인들이 모여 있던 곳은 명동 휘가로 다방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연극인들 특히 이해랑 선생은 영화하는 사람들을 보고 "이 활동사진쟁이들!"라고 불렀다고 전했다. </div> <p contents-hash="2fa97fa28972533ca8875fa3a6e298108bad3fbe40870ed9dba6fb8bce7e7a3b" dmcf-pid="Qze687sAFM" dmcf-ptype="general">노만은 또한 '잡지에 실리는 배우들이 화보와 브로마이드도 촬영도 명동에 있던 사진관인 신흥사장과 고향사장이었고, 당시 갓 데뷔했던 강효실 배우(최민수 배우의 어머니)의 프로필 사진을 찍은 것도 기억에 남는다'며 '1955년 김기영 감독 <주검의 상자>로 데뷔한 강효실 배우는 전진희라는 예명으로 활동했고, 이때 찍은 프로필 사진이 <영화세계> 1955년 5월호 표지로 쓰였다'고 회상했다.</p> <p contents-hash="6becb424fbc3de417153a64a72889cc8339f0cb20cf15c46e87a8829c482f16a" dmcf-pid="xIFHGOPKFx" dmcf-ptype="general"><영화세계> 이후 <국제영화>, <스크린>, <영화예술> 등으로 잡지사를 옮겼던 노만은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창립 과정에도 기여한다. 1960년 한국영화비평가협회가 만들어졌을 때는 발기인이자 창립회원으로 참여했고,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인해 한국영화비평가협회가 해산된 이후 1965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로 다시 결성됐을 때는 기획간사로서 기초를 다지는데 일조했다.</p> <p contents-hash="b96bb460663f3a1ff9890473f80e212ba6ebe377b9829f8ab236ba9d916afdb5" dmcf-pid="yVgde2vm3Q" dmcf-ptype="general">1961년부터 한양대학교에 출강해 한국영화사를 가르치게 되는데, 한양대 정용탁 명예교수는 이 시기 노만의 강의를 수강했다. 배우 최불암, 노주현, 임현식, 촬영감독 박승배도 노만의 기억에 남아 있는 학생들이다.</p> <p contents-hash="f65a23e94babb5c5fee218ddbc0dba9bda836e72e176232947ff888eb9d51d30" dmcf-pid="WfaJdVTs3P" dmcf-ptype="general">강의 교재는 자신이 직접 저술한 <한국영화사>였다. <한국영화사>는 1959년 집필을 시작하게 된다. 1958년 대학 졸업 때 그간 영화기자로서 만났던 윤봉춘·이규환·안종화·복혜숙 등 영화인들 인터뷰를 메모지에 기록하면서, 한국영화사 정리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p> <p contents-hash="dcaa4bf296990a57692a27ca57a4c9388bca4dd31e77014306164f6ba7b74a27" dmcf-pid="Y4NiJfyOU6" dmcf-ptype="general"><동아일보> 창간호를 시작으로 해방 직전 발행호까지 영화와 관련된 기사와 광고를 빼놓지 않고 확인했고, 원로영화인들을 인터뷰한 것도 바탕이 됐다. <임자없는 나룻배>(1932)와 <춘향전>(1955)을 연출한 이규환 감독의 동숭동 낙산 자택을 찾아가 손님 대접으로 내온 설탕물 한 사발을 들이키며 일제 강점기 나운규와의 영화계 활동과 <나그네>(1937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p> <div contents-hash="51b3676b27799b62fd5e384c2ab49a731782972c5344627c983eb75b4b6618b3" dmcf-pid="G8jni4WIp8" dmcf-ptype="general"> <strong>지배 권력의 수탈에 맞선 민중 저항 담은 <춘향전></strong>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e0f1148fe2204c92446acc7c59e70815d6f48a2f9c2435a0a10ee04ff00ee035" dmcf-pid="H6ALn8YCz4"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2/14/ohmynews/20251214163251271uvon.jpg" data-org-width="1280" dmcf-mid="z1hrwLUZ0A"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2/14/ohmynews/20251214163251271uvon.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strong> 지난 6월 세종도서관에서 안종화 선생에 대해 강연하고 있는 노만 평론가</td> </tr> <tr> <td align="left">ⓒ 한상언영화연구소 제공</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ef1c7331dd75b0dd6891232e296281a7183caba54ce41be0fed913a3e01c75e3" dmcf-pid="XPcoL6Ghpf" dmcf-ptype="general"> 영화 기자로 활동할 당시 실존주의와 네오리얼리즘 등의 영화담론이 유행하면서 노만은 한국영화의 리얼리즘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1955)이 계기가 됐다. 반공법 위반 논란이 생기며 용공 시비에 휘말렸지만 영화문법에 맞게 촬영된 수작이었다. 우리영화가 담아야 할 현실은 어떠해야 하는지, 한국적인 현실과 영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겨난 것이었다. </div> <p contents-hash="a5c1c96e974ea1b300c39aaa954488b13a9418e99e558260a130511def22ffa8" dmcf-pid="ZQkgoPHlFV" dmcf-ptype="general">대학 강의를 하면서 그 고민은 정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노만이 한국영화의 본질을 저항으로 규정한 것은 눈여겨볼 부분이다. 노만은 '한국문학의 본질이 끈기에 있다고 본다면 한국영화의 본질, 즉 한국영화에서의 한국적인 것은 저항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한국영화의 전환점으로 존재했던 <춘향전>을 예로 들었다.</p> <blockquote class="talkquote_frm" contents-hash="146ac28c999e8fb9529b41f57c6558c663e6a30c7ded1bc8a9aeb0ae2713cfff" dmcf-pid="5Vgde2vmF2" dmcf-ptype="blockquote2"> <춘향전>의 텍스트는 단순한 청춘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넘어 한국 문학사 전반에 핵심을 이루는 연구대상이자 텍스트로 존재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시대적 고찰과 사회상은 물론 신분 질서의 양상, 특히 작중에서 변학도로 대변되는 지배 권력의 폭정과 수탈, 이제 대한 민중의 저항이 핵심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br> <br>1923년 일본인 하야카와 고슈를 시작으로 1935년 이명우, 한국전쟁 이후인 1955년에 만들어진 이규환, 1958년 안종화, 1961년 홍성기, 신상옥의 영화들은 각각 무성영화, 최초의 발성영화, 한국전쟁 이후 흥행작, 국내기술로 시도된 천연색 영화, 시네마스코프 영화로 기록되었다. <br> <br>이처럼 한국영화사의 주요국면마다 기술적 시도와 흥행을 이룬 춘향전은 한국영화의 저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저항이 나운규의 영화 정신에서도 이어졌음을 물론이다. </blockquote> <div contents-hash="b446e0a5b5d93ec672c7fb87601452abd254452375897dde5a82ae6482e33f80" dmcf-pid="1faJdVTsU9" dmcf-ptype="general"> <br>노만은 10년 정도 대학 강의를 이어가면서 영화수출업에도 뛰어들어 1969년 이만희 감독 <만추>를 미국에 수출하기도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후 1970년 부친의 사업을 이어받으면서 영화계를 떠나게 된다. </div> <p contents-hash="61dac3203889b83b0ef7abdd32fc8db2c1caaa57bb5451d044e03dbf7e241434" dmcf-pid="t4NiJfyOFK" dmcf-ptype="general"><영화사가 노만>에는 한국영화의 기점에 대한 문제 제기를 통해 오류를 확인하게 된 과정 등도 세세하게 담겨 있다. '월하의 맹세'를 한국영화의 기점으로 봤으나 제작연도가 1921년이 아닌 1923년이라고 문제제기를 했고, 바로잡게 된 것이다.</p> <p contents-hash="c8e44b407b79055c57b7d4cd93f8b4b501719a965923f6cc5ccd02bf0da245e6" dmcf-pid="F8jni4WI7b" dmcf-ptype="general">이렇듯 오랜 시간 야인으로 있다가 영화인으로서 정체성을 다시 찾은 노만이 구술한 195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풍경은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이 많기에 연구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특히 한국영화의 정체성과 본질에 대한 고민은 후세에도 좋은 교훈을 안겨주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노만의 재등장 이후 그의 이야기를 구술채록해 최근 별도의 기록을 남겼다.</p> <p contents-hash="3b88ada2bd67a5b217871adca6793df8e9f6f24e0796a98684793048a5b84e8e" dmcf-pid="36ALn8YCpB" dmcf-ptype="general"><영화사가 노만> 저자인 유창연 박사는 영화사연구자로 『안종화 「한국영화 40년 약사」』(공저, 두두북스, 2024), 『사탄탱고: 벨라 타르에 들어가기 앞서』(공저, 코프키노, 2025) 등을 펴냈다.</p> </section> </div> <p class="" data-translation="true">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p> 관련자료 이전 'K-뷰티' 진면모 보여주며 화제성 씹어먹은 韓 예능 12-14 다음 아이브 안유진, 비행기에서도 풀메이크업 ‘화려한 미모’ 12-14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한 회원만 댓글 등록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