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불편한' 이 다큐를 끝까지 지켜 본 이유 작성일 01-30 3 목록 <div id="layerTranslateNotice" style="display:none;"></div> <strong class="summary_view" data-translation="true">강릉 독립극장에서 다시 마주한 <티티컷 풍자극>의 질문</strong> <div class="article_view" data-translation-body="true" data-tiara-layer="article_body" data-tiara-action-name="본문이미지확대_클릭"> <section dmcf-sid="9NDhQCcnJr"> <p contents-hash="d8efe8234a7fb011487443e9acf110555fc02ddf03992af35f095552bba8b433" dmcf-pid="2jwlxhkLiw" dmcf-ptype="general">[진재중 기자]</p> <p contents-hash="3df38c5bdfab7aef7601acf9d8e9156148bb4c300f926b7c72c7e6dc8fe22633" dmcf-pid="VArSMlEoMD" dmcf-ptype="general">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온 사람이다. 그래서 지난 29일,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티티컷 풍자극>을 강릉의 작은 독립극장에서 마주하는 일은 단순한 관람이 아니었다. 이 작품을 본다는 것은, 다큐멘터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었는지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자, 내가 그동안 지켜왔던 작품들을 돌아보는 일이기도 했다.</p> <p contents-hash="a9546b6e03ae371cebeaa81b7af7a09d54fa17d96987387609f5c52fa6ea7ce2" dmcf-pid="fcmvRSDgME" dmcf-ptype="general">영화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리지워터 주립병원 내부, 수감자와 직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음울한 장기자랑 장면으로 시작된다. 노래는 웃음을 가장하고 있지만, 노래가 끝나자 화면은 곧장 어두운 공간으로 이동한다. 이 전환은 이곳이 치료라는 이름으로 작동하는 장소가 아니라, 통제와 관리의 공간임을 예고한다.</p> <p contents-hash="9bd60ca08ef9e85fcf28fddcb1ac8e2dbf581cdaa48829da9f9964d32c20be7b" dmcf-pid="4ksTevwaek" dmcf-ptype="general">환자이자 죄수인 이들은 무대의 주인공이자 연기자였다. 다큐멘터리의 거장은 이들을 카메라 앞에 세우며, 관찰자이자 연출자의 위치를 끝내 내려놓지 않는다. 치료를 위한 예술 활동이라는 포장은 정교하지만, 프레임 안에서 그들의 몸짓과 말은 이미 배치되고 선택된다. 자발성은 허용된 범위 안에서만 작동하며, 카메라는 그 경계를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고정한다.</p> <div contents-hash="9d6c570db3fc3fcacc0fc551956b8774076bc8101414d2c6e943ae7e71b921ab" dmcf-pid="8HFqsz5TJc" dmcf-ptype="general"> <strong>불편함을 견디는 시간</strong>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82a7277e22434c1d1a6ee60d76e4e52165c2b58b8b48d0f3958cfe8be393e8c9" dmcf-pid="6X3BOq1yRA"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601/30/ohmynews/20260130153725048tkxg.jpg" data-org-width="1280" dmcf-mid="0JWtj1vmnT"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30/ohmynews/20260130153725048tkxg.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strong> <티티컷 풍자극>을 보기 위해 찾은 극장.</td> </tr> <tr> <td align="left">ⓒ 진재중</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4ae8ff85eb3b964b170ea940b0983ac9ab5a6d866d06299b1f9babc863cb7d31" dmcf-pid="PZ0bIBtWJj" dmcf-ptype="general"> 화면이 진행될수록 나는 점점 불편해졌다. 영화는 환자들이 겪는 만연한 제도적 폭력과 비인간적인 처우를 숨기지 않는다. 강제 급식, 반복되는 명령, 인격을 고려하지 않는 의료 행위가 일상의 장면처럼 이어진다. </div> <p contents-hash="2f0f9b4e38e1d4602d758da222259c15b6370faddd4fc003776855df34c83514" dmcf-pid="Q5pKCbFYiN" dmcf-ptype="general">카메라는 멀어지지도, 위로하지도 않는다. 그저 끝까지 지켜본다. 화면은 좀처럼 서두르지 않는다. 한 인물이 말을 다 할 때까지, 지루하리만치 인내한다. 그 시간은 고스란히 관객의 몫이 된다. 중간에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다. 그러나 일어서지 못했다. 혹시라도 이 영화가 마지막에 무언가 다른 질문을 던질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고, 동시에 이 불편함을 끝까지 견디는 것이 다큐를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p> <p contents-hash="e29917fc330df446647efb445ceafeb5da22080d1c50a4c5ca80bba676d4e148" dmcf-pid="x1U9hK3Gea" dmcf-ptype="general">1967년작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질문을 더 키웠다. 법학을 전공한 감독은 초상권과 인권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공간인 정신병동은 어떤 과정을 거쳐 촬영될 수 있었을까. 나체로 노출된 수감자들은 과연 동의했을까, 아니면 동의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구조였을까.</p> <p contents-hash="f9007113f431f7e80d100ff2e8e2f18020becff307a284aa8467c37b7149d64e" dmcf-pid="yLAs4maeMg" dmcf-ptype="general">화면을 바라보며 나는 동시에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면,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었을지를. 이 작품은 끝내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그 현장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었을지 짐작하게 하는 질문만을 남긴다.</p> <p contents-hash="3964814cd1fcee065b9c0cb3551a96c7e11ff5fe20b87f4531104437e3a7395b" dmcf-pid="WocO8sNdJo" dmcf-ptype="general"><strong>설명을 거부하는 영화</strong></p> <p contents-hash="3107560d53db26f5c5625313cbc429d8fc70b82744ab25ffe492fbb651629820" dmcf-pid="YgkI6OjJiL" dmcf-ptype="general">이 영화는 이른바 '3무(無)'의 형식을 취한다. 내레이션도, 음악도, 인터뷰도 없다. 심지어 관객을 안내할 자막조차 배제된다. 설명을 거부하는 이 태도는 친절함의 결핍이 아니라, 영화가 선택한 윤리적 거리이자 미학적 전략이다.</p> <p contents-hash="0b6f1126780842858a96a10186346e717009d7d33eff72e2e3b2d5a53dee324e" dmcf-pid="GaECPIAiMn" dmcf-ptype="general">내레이션이 사라진 자리는 환자와 치료자 사이에서 오가는 강압적인 치료의 언어, 그리고 그에 어긋나거나 빗나가는 정신병 환자들의 엉뚱한 대답이 대신한다. 설명과 해설은 없지만, 권력과 저항의 구조는 그 어긋남 속에서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다. 말은 정리되지 않고, 의미는 미끄러지며, 그 불완전함 자체가 이 공간의 실체를 증언한다.</p> <p contents-hash="44c08bddf7c822d9f58b27d43e3ff129c7ffb16035dd822a14872173558acb40" dmcf-pid="HNDhQCcnei" dmcf-ptype="general">음악 역시 외부에서 삽입되지 않는다. 대신 사회에서 한때 색소폰을 불었을 법한 한 환자의 연주가 영화의 소리를 채운다. 그 거친 호흡과 불안정한 음정은 배경 음악이 아니라, 이 공간에서 살아 있는 몸의 리듬이다. 여기에 영화의 첫머리와 마무리를 장식하는 합창이 더해지며, 음악은 장식이 아니라 집단의 존재를 가시화 하는 행위가 된다.</p> <p contents-hash="ce070443f8fb55d89ca106375dee6c19327b7382b10a91cbab19ae69d5b50fb8" dmcf-pid="XjwlxhkLeJ" dmcf-ptype="general">인터뷰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질문과 답변의 형식은 해체되고, 대신 정치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환자와 종교를 설교하듯 말하는 환자의 독백이 화면을 점유한다. 이 말들은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체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의 사고가 어떻게 세계를 해석하는지를, 검열 없이 드러내는 순간들이다.</p> <p contents-hash="71f73d473cc736f7221f975d0e78e5d6ec026835e2498f312a747af57141254e" dmcf-pid="ZArSMlEoRd" dmcf-ptype="general">이렇게 영화는 모든 설명의 장치를 걷어내고, 오직 현존하는 말과 소리, 몸짓만을 남긴다. 그 결과 관객은 이해 받는 위치가 아니라, 마주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이 침묵과 결핍의 형식은 치료의 언어 뒤에 가려진 통제의 구조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며, 이들이 누구인가를 설명하기보다, 이들이 놓인 조건을 그대로 응시하게 만든다.</p> <p contents-hash="8aa1e53f38465d441b352b111091b834bfe1fc3fd0d2d863be791f6e79cf8f7d" dmcf-pid="5cmvRSDgde" dmcf-ptype="general">와이즈먼은 개입하지 않는다. 해설도, 인터뷰도 없다. 그는 설명을 포기하는 대신, 판단을 관객에게 넘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불친절하고, 견디기 어렵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다큐멘터리의 윤리가 가장 날카롭게 드러난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보다, 무엇을 끝내 말하지 않는가의 문제다.<br>영화는 시작과 끝이 같은 구조로 묶이면서, 이 공간에서 시간은 흘러가지만 상황은 반복된다는 사실이 또렷해진다. 치료의 서사는 없고, 회복의 약속도 없다. 남는 것은 제도 속에 고정된 인간의 얼굴들이다.</p> <p contents-hash="e434f17540fef441d09a4088f66a4cb3de215ee0db403d7e4164cd32189ec578" dmcf-pid="1sSXoHCELR" dmcf-ptype="general"><strong>나의 카메라를 떠올리다</strong></p> <p contents-hash="0489028f2697871446cf393cda8ddc590e6b25889b6dcfbba779951a707495e4" dmcf-pid="tOvZgXhDRM" dmcf-ptype="general">다큐멘터리는 본래 관객에게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장르다. 서사적 친절함보다는 관찰과 기록에 무게를 두고, 설명을 최소화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떤 다큐멘터리는 관객에게 사고의 통로를 열어주며, 화면 너머의 세계로 천천히 이끈다.</p> <p contents-hash="ed88aa3955049121c80332cd554fb659043ff8349f78a637a6d5bca173f0f2f3" dmcf-pid="FIT5aZlwRx" dmcf-ptype="general">그러나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지닌 접근의 어려움을 한층 더 극대화한다. 관객은 공감할 틈을 얻기보다 당혹감과 불편함 앞에 놓이고, 이해보다 침묵을 강요받는다. <티티컷 풍자극>은 관객에게 다가가는 작품이 아니라, 관객을 끝까지 밀어내며 바라보게 만드는 작품이다.</p> <p contents-hash="61909f9efe4a1a77afe49e3777448b605025b79f0f3a51aaca64df2efc6b4797" dmcf-pid="3Cy1N5SrnQ" dmcf-ptype="general">바로 그 거리감 속에서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윤리와 태도를 묻는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가 아니라, '어디까지 개입하지 않을 것인가'를. 그리고 그 질문은 관객에게 쉽지 않은 숙제를 남긴다.<br>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극장은 쉽게 밝아지지 않았다. 자리를 끝까지 지킨 관객은 많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이 영화를 봤다기보다 하나의 질문을 통과하고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p> <div contents-hash="e31bfc8a2533e0a0af70dfbeabc9b24a87e55a2d45b4df1386715c30dbc314e9" dmcf-pid="0hWtj1vmRP" dmcf-ptype="general"> <티티컷 풍자극>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분명 문제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다큐멘터리가 외면해왔던 질문을 가장 정면으로 던진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나 자신의 선택과 한계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끝내 자리를 뜨지 못했다. 불편함을 견디는 일 역시, 기록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c62c5fd0e966cca2129b692de32beaefbab87852ca60993a1a8feca6711054b5" dmcf-pid="plYFAtTsi6"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601/30/ohmynews/20260130153726325miyj.jpg" data-org-width="1016" dmcf-mid="KyZUDpGhMm"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1/30/ohmynews/20260130153726325miyj.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strong> 갱도에서 석탄을 캐는 광부</td> </tr> <tr> <td align="left">ⓒ AI생성 이미지</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99f8cc7554cca64e91104120df3b9ea032c4157eeeff72a93c81f11cbe09addb" dmcf-pid="USG3cFyOn8" dmcf-ptype="general"> 나는 오래 전 만들었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 어두운 갱도 속에서 검은 삶을 살아가던 광부들의 이야기였다. 카메라는 늘 빛이 닿지 않는 공간을 향했고, 화면은 의도적으로 흑백으로 처리했다. 컬러가 당연해진 시대에 흑백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했다. 색을 덜어낼수록 노동의 질감과 얼굴의 표정이 더 또렷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작품 역시 최소한의 음악만을 사용했고, 과도한 설명은 피했다. 내레이션 대신 자막과 침묵, 그리고 인터뷰의 호흡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려 했다. 관객을 설득하기보다, 장면 앞에 세워두고 스스로 판단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div> <p contents-hash="ba710cbb0619844a2cab02d2fae4df6d09c29f8f1a53e79f7841440ca25ff6f5" dmcf-pid="uvH0k3WIR4" dmcf-ptype="general"><티티컷 풍자극>을 보며 그때의 선택들이 자연스럽게 겹쳤다. 컬러의 시대에 흑백을 선택한 용기,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남기려 했던 태도. 와이즈먼의 카메라는 내가 과거에 고민했던 지점들을 훨씬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광부의 다큐멘터리가 노동의 현실을 드러내는 데서 멈췄다면 <티티컷 풍자극>은 기록 그 자체가 윤리적 논쟁의 한가운데로 들어간다는 점이다. 카메라는 증언자인 동시에 가해의 경계에 서 있고, 그 불편한 위치를 끝내 회피하지 않는다.</p> <p contents-hash="6c5f9b6b6af7b89c7f7b6e84171332355009329a624de878041448c356bbdc14" dmcf-pid="7TXpE0YCMf" dmcf-ptype="general">그래서 이 영화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사람에게는 자신의 선택들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에 가깝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보다, '어디까지 침묵할 것인가',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 과연 중립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상영관을 나선 뒤에도 오래 남았다.</p> </section> </div> <p class="" data-translation="true">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p> 관련자료 이전 ‘타년타일’ 허광한의 새로운 매력 담은 ‘캐릭터 메이킹 영상’ 공개 01-30 다음 엔시티 도영, 생일 맞아 자립준비청년 위해 1억 기부 01-30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한 회원만 댓글 등록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