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 마라톤]7월 22일, 베를린 마라톤 금빛 영광의 새로운 출발점 작성일 07-22 19 목록 <div style="text-align:center"><span class="end_photo_org"><img src="https://imgnews.pstatic.net/image/477/2026/07/22/0000619622_001_20260722160017714.png" alt="" /><em class="img_desc">▲ 서울역에서 베를린으로 출발하는 열차에 오른 손기정, 남승룡 선생과 일행들(사진 위), 아래는 손기정 선생과(맨 왼쪽)과 일행들이 독일 베를린 프리드리히역 도착 모습. ⓒ손기정기념재단</em></span></div><div style="text-align:center"><span class="end_photo_org"><img src="https://imgnews.pstatic.net/image/477/2026/07/22/0000619622_002_20260722160017795.png" alt="" /><em class="img_desc">▲ 서울역에서 베를린으로 출발하는 열차에 오른 손기정, 남승룡 선생과 일행들(사진 위), 아래는 손기정 선생(맨 왼쪽)과 일행들이 독일 베를린 프리드리히역 도착 모습.ⓒ손기정기념재단</em></span></div><br><br>[스포티비뉴스=이성필 기자] 한국 올림픽 출전사(史)에 가장 중요한 이정표인 손기정 선생의 금메달은 도전과 극복의 연속이었다.<br><br>1935년 11월 3일, 일본에서 열린 메이지 진구 대회, 1936 베를린 하계 올림픽 마라톤 1차 선발전을 겸한 대회에서 손기정은 2시간26분42초의 공인 세계 기록으로 우승한다.<br><br>자격을 얻으며 나선 1936년 5월 21일, 일본 도쿄 진구(神宮) 경기장, 베를린 하계 올림픽 마라톤 일본 대표 최종 선발전이 열렸다. <br><br>당시 21명이 출전한 가운데 일제하 식민지라는 아픔을 겪고 있던 나라 잃은 이들은 손기정과 남승룡을 주시했다. 선발전 1위였던 손기정과 달리 남승룡은 1위를 해야지만 선발한다는 실로 황당한 조건이 붙었기 때문이다.<br><br>놀랍게도 남승룡이 2시간36분05초로 1위, 손기정이 2시간38분02초로 2위로 결승선에 들어왔다.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는 결과였다. <br><br>이들은 본 대회에서도 일을 냈다. 8월 9일 열린 대회에서 손기정이 2시간29분19초로 금메달, 남승룡이 2시간31분42초로 영국의 어니스트 하퍼(2시간31분23초)에 이어 3위로 동메달을 획득했다. <br><br>이 여정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6월 3일, 윤치호 조선체육회장 등이 격려회를 열었고 4일 오후 이들의 출신교인 양정고보(현 양정고) 학생들과 교직원이 모두 서울역으로 모여 베를린으로 떠나는 손기정, 남승룡을 환송했다. <br><br>일본육상경기연맹은 현지 적응을 위해 시오아쿠, 스즈키까지 4명을 선발했다. 본선 엔트리 규정은 3명 출전이었지만, 1명 더 뽑은 것, 베를린 현지에서 최최종 선발전을 치러 1명을 탈락시키려는 의도였다.<br><br>물론 조선인 1명이 희생양이었다. 만주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러시아 모스크바를 지나 베를린까지 긴 여정이었고 17일에 도착했다. 이들을 향해 독일 주재 일본대사관 직원은 "왜 조센징(조선인)이 두 명이나 있는가"라며 손기정, 남승룡 선생을 비하했다. <br><br>분노를 참고 연습했지만, 본선을 20여일도 남기지 않았던 7월 22일, 30km를 달리게 한 '최최종 선발전'이 열렸다. 그야말로 황당한 처사다. 일제는 어떻게든 한민족의 기상을 물리력으로 누르려고 했고 힘이 없는 상황에서는 일본의 반강제 행위에 실력으로 이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br><br>일본은 손기정, 남승룡 중 한 명이 4위만 한다면 독일과의 관계를 이용해 4위로 선발전을 마쳤던 스즈키를 올리겠다는 본색을 숨기지 않았다. 야만적이면서 반스포츠적인 행동이었다. <br><br>하지만, 민족의 혼을 달고 뛴 손기정, 남승룡은 나란히 1-2위를 차지했다. 두 사람이 달렸던 길은 분노가 녹아 있었고 동시에 한민족의 기상이 베를린에 영원히 뿌리내리는 날의 출발이기도했다. <br><br>이를 알고 있던 시오아쿠는 열등감을 극복하려 지름길로 달리는 등 편법을 마다치 않았고 3위로 겨우 베를린 티켓을 넣었다. 한참 부족했던 스즈키는 중도 기권하며 자신의 역량 부족을 실력으로 알렸다. 한민족의 '달리기 DNA' 우수성을 몸으로 증명한 것이다.<br><br>'베를린의 영광'에 단순한 하루로 지나갈 수 있었지만, 일본의 힘에 굴복하지 않은 조선인 두 청년에게는 당당한 날이었다. 일본의 꼼수를 정수로 되받은 쾌거 중 쾌거였다. <br><br>전무후무한 '최최종 선발전'을, 일본은 역사 속에서 지우고 싶어했지만, 분명 우리에게는 베를린의 기쁨을 다시 확인하는 날이 되기에 충분했던 하루였다. <br><br>이날의 분명한 승리는 가슴 아프지만, 민족의 힘을 알린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의 쾌거로 이어지는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무자비한 힘과 온갖 불법에 정정당당으로 맞서 이겨낸 기쁨의 날이었다. <br><br> 관련자료 이전 [주간스타트업동향] 모티프테크놀로지스, 독파모 AI 언어모델 '모티프 3' 글로벌 오픈소스 3위권 기록 外 07-22 다음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에 KLPGA 선수 올해는 15명, 내년부터 30명 출전...LPGA와 극적 합의 07-22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한 회원만 댓글 등록이 가능합니다.